[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입석금지 버스’에서 생긴 일
능소화(凌?花)라는 꽃이 있다. 능소화는 중국원산으로 예전에는 중부 이남 사찰에서 주로 심었다. 지금은 중부지방의 공원, 사찰, 아파트 단지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가지에 흡착근(吸着根)이 있어 담장이나 큰 나무에 붙어 올라간다. 시골 돌담은 물론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담, 벽돌담, 지붕까지 가리지 않는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와 함께 “매력적인 당신은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기쁨을 이웃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라는 멋진 꽃 점(占)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소화는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마음과 슬기를 가진 꽃이다. 백승훈 시인은 ‘서로를 꽃 피우는 일-능소화’를 지었다.
“초록 그늘마저 시들해지는/ 염천의 하늘 아래/ 강대나무 타고 올라 주황색 꽃등 켠/ 능소화 홀로 눈부십니다./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기대어 인연을 맺고/ 누군가를 꽃 피우는 일/ 죽은 나무가 선선히 몸을 내주어/ 저리 눈부시게 능소화 꽃 피운 것을 보며/ 당신을 꽃 피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를 내어주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꽃으로 피면/ 나는 더 향기로울 수 있으니까요.”
노년은 인생을 살아온 벌일까, 훈장일까? 어떤 노인이 서울근교 신도시에서 버스를 탔다. 입석제도를 없이 한다고 하여 버스타기가 쉽지 않은 요즘, 택시도 없고 버스 배차 간격도 길어 세 번째 오는 버스에 비비고 올라탔다. 만석이어서 자리가 없었다. 운전사는 규칙상 입석은 안 되니 내리라고 한다. 부득이한 약속이 급해서 그러니 바닥에라도 앉아가겠다고 사정했다. 버스기사는 계속 안 된다는 것이다. 40여 승객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바닥에 손수건을 깔고 앉으려는 순간 바로 앞에 세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앉힌 삽십대 승객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아기를 안고 가면 안 될까요?” 순간 청년은 얼굴을 확 붉히면서 소리 질렀다. “저도 돈 내고 탔거든요.”
노인은 할 말을 잃고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소 시간관념이 너무 철저한 성벽(性癖) 때문에 이렇게 무리한 승차를 감행한 스스로가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팔십 가까운 나이에 그 모멸감과 낭패감이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몰려 왔다.
결국 운전기사가 자기 방석을 내주어 버스 바닥에 앉아 서울로 올라갔지만 노인은 하루 내내 심사가 서글프고 괴로웠다. 돈 안내고 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할아버지 같은 노인에게 망신을 준 청년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거다. 중국의 한신 장군이 백만 대군을 거느리며 천하를 호령하다 감옥에 갇히니 일개 옥졸이 제일 무섭더라는 고사가 생각난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날아온 까치를 보고 저게 무슨 새냐고 물었다. 아들이 “까치잖아요” 했다. 아버지가 재차 물었다. “까치라니까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애비야! 네가 어렸을 때에는 백번도 더 물어 그 새를 알았단다. 아버지께 그렇게 말하지 마라.”
이런 예화는 한도 없이 많다. 특히 파고다공원이나 지하철 등 노인들 모임 장소에 가면 노인들은 거의 쓰레기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다. 걸핏하면 세상 먼저 가고 싶으냐고 주먹질하는 패륜아들이 들끓는 세상이다. 국물 뺀 멸치 마냥 버려진 노인들! 별 볼일 없는 아버지! 죽어서야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슬픈 존재의 아버지들!
젊은이들이여, 당신들 청춘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듯이 우리네 노경(老境)도 바라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 격언처럼 독수리의 노경은 참새의 청춘보다 더 빛날 수도 있다. 제발 건방떨고 오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20세기 최고 지성이라는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말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해 다른 별로 간다면 한국의 효와 경로사상을 가지고 가고 싶다.”
노인들을 위로하는 말이 있다.
“늙음을 슬퍼하지 마라. 지혜가 그만큼 느느니라.”
“젊음은 아름답지만 늙음은 고귀하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세월은 약이다. 세월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위대한 나라는 젊은이들이 망치고 노인들이 회복시킨다.”
생로병사 이치는 우주 자연의 법칙이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범부가 깨쳐 부처가 되며, 제자가 배워 스승이 되는 것, 젊은이가 함부로 어른을 대할 수는 없는 이유다. 노인을 홀대하면 젊은이도 늙어 그런 수모와 슬픔을 겪는 법이다.
<음부경>(陰符經)에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말이 나온다. 생로병사는 마치 사시(四時)가 순환하는 것과 같고, 주야(晝夜) 반복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곧 우주만물을 운행(運行)하는 법칙이요, 천지를 순환하게 하는 진리다. 육신의 생로병사는 불보살이나 범부중생이 다 같은 것이다. 다만 불보살들은 그 거래(去來)에 매(昧)하지 아니하고 자유로 하는 것이고, 범부중생들은 그 거래에 매하고 부자유한 것이 다를 뿐이다.
능소화가 그리워지는 노경이다. 몸은 늙었어도 당신을 꽃 피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를 내어주고 싶다. 당신이 꽃으로 피면 나는 더 향기로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