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진실과 화해
‘남아공의 위대한 아들’ 넬슨 만델라가 12월6일 95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남아공 트란스케이(Transkei) 움타타(Umtata) 근교 쿠누(Qunu)에서 추장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흑인들의 비참함을 목도(目睹)하고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동맹을 설립하는 등 흑인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2년 남아공 첫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흑인 권익을 위한 변호활동을 펼쳤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저항하다가 1956년 반역죄로 기소되어 1961년 무죄로 석방된다.
무죄로 석방된 그는 무장 폭력 투쟁에 나섰다. 비폭력투쟁에서 무장폭력투쟁으로 전향한 이유는 1960년 70여명이 숨지는 ‘샤프빌 대학살사건’ 때문이다. 그는 아프리카민족회의 안에 ‘국가의 창(Spear of the Nation)’이란 뜻의 ‘움콘트 웨 시즈웨'(UmkhontoWe Sizwe)’ 군사조직을 창설하여 최고사령관으로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는 1962년 체포돼 또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1964년에는 ‘사보타지 및 정부 전복 음모죄’가 추가돼 종신형 선고를 받는다. 만델라는 케이프타운 항구 인근에 있는 로벤섬 교도소에 수감돼 19년간 복역했다. 그리고 1982년에 케이프타운 교외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돼 다시 8년간 수감, 2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국제사회는 만델라 석방운동을 펼쳤다.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한 데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을 가지고 만델라와 협상을 한다. 그리고 1990년 2월 만델라의 무조건 석방, 비상사태 부분해제, 정치범 석방, 아프리카민족회의 합법화를 선언했다.
만델라는 백인정부와 협상해 350여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남아공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가하는 총선거가 실시됐다. 여기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하면서 만델라는 대통령에 선출돼 그해 5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넬슨 만델라가 이끈 민주화 투쟁으로 폐기된 과거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흑인차별정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국민당(NP) 정권은 남아공을 소수 백인이 지배하는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흑인 등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한 악명 높은 차별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심지어 백인 정권은 당시 백인과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했으며, 성행위까지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또 모든 주민은 당국에 자신의 인종을 등록하도록 해 특정한 거주 지역에서 살아야만 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차별정책에 남아공의 흑인들이 얼마나 증오와 원한과 고통에 시달렸을까? 그러나 만델라는 자신과 자신의 종족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한 가해자들을 진심으로 껴안았다. 그리고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기 직전인 나라를 구하고, 국민 전체에 저주와 증오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심었다. 전 세계가 이 기적에 감동했다. 인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아마도 ‘인간에게는 선(善)한 본성이 있다’는 이 희망의 불씨는 만델라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델라는 평생 백인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분노를 몸에 새기며 살았지만 그가 감옥에서 출옥한 그날부터 ‘용서와 화해의 사도’로 변신했다. 과거사에 사로잡히지 않는 용기, 마디마디 새겨진 고통과 수난을 보상받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리고 남아공을 넘어 인류가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비전을 잃지 않은 그의 지도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靈感)을 주고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만델라는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백인들은 전면적인 사면을 주장했으나 만델라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범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 동기였음을 증명하면 위원회는 개인별로 사면을 행한다”고 정리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사면과 화해는 없다고 주장한 만델라는 “우리는 용서할 수는 있으나 결코 잊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것이 교섭에 의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남아공은 흑·백인종으로 갈라진 나라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듯한 이 강(江)도 ‘타협과 화해’라는 다리로 이어졌다. 남아공에 비하면 갈등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실상 없는 우리나라에서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보수와 진보, 노와 사로 나뉘어 죽기 살기로 싸운다. 다른 민족도 아닌 배달의 민족끼리 말이다. 왜 이토록 갈라져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하는지?
남아공같은 철천지 원수같은 흑백갈등도 ‘진실과 화해’ ‘대화와 타협’ ‘이해와 용서’로 갈등과 차별을 치유(治癒)하고 있다. 모든 일을 화(和)와 유(柔)로써 해결하면 능히 강(剛)을 이길 수 있다. 그래야 싸움을 멈추고 대화와 타협, 이해와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도 모든 갈등과 차별을 여의고 ‘진실과 화해’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