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솔제니친 “상상력이 나를 살렸다”

우리 인간들은 같은 사물을 대하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이 한결같지 않다. 카페 ‘덕화만발’을 운영하면서 괴로움에 처할 때가 가끔 있다. 세상을 보는 시각(視覺) 때문이다. 저마다 종교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며 정치를 보는 눈도 다르다. 저마다 다른 시각을 가진 우리들이 저만의 시각을 고집하면 우리들의 카페 덕화만발은 어찌 될까? 사분오열되어 싸움터로 변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덕화만발 가족들이 협의를 거쳐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덕화만발 4대강령’을 제정한 것이다.

하나,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어떤 사람은 나무를 대하면 돈을 벌수 있는 목재로 보고 또 어느 사람은 가족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땔감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생명으로 보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주는 주체로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나무를 돈이나 장작을 넘어선 가치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을 달리 보는 것은 살아가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세상을 알고 있는 자’라고 칭송하자,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기는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는 그 문제를 가지고 호수가에서 자신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그 때 물속에서 송사리 한마리가 저 넓은 세상(호수)을 바라보며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좀 더 큰 덩치의 물고기가 입맛을 다시며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아주 큰 덩치의 물고기가 또 쫓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소크라테스는 “그래 나는 무지(無知) 하구나! 이제부터는 나는 아니다. 남들이 모르는 ‘나는 무지하다’라는 사실을 하나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고로 나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인생의 진리를 깨쳤다고 한다.

한쪽만 보는 세상은 송사리가 보는 세상과 같다. 세상을 보는 눈도 자기가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다. 절대 선(善)도, 절대 악(惡)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눈에 미움의 안경과 사랑의 안경을 쓰면 세상사 밉게도 보이고 예쁘게도 보이는 것이다. 미움의 안경을 쓰고 보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착한 사람은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인다. 얌전한 사람은 소극적으로 활력 있는 사람은 경박한 사람으로 보인다. 또 잘 웃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으로, 예의바른 사람은 얄미운 사람으로, 듬직한 사람은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잘난 체하는 사람도 똑똑해 보이고, 어수룩한 사람도 착해 보인다. 실없는 사람도 밝아 보이고, 얄미운 사람도 싹싹해 보이며, 미련한 사람도 든든하게 보인다.

다음 세 가지 마음을 품고 살기를 권한다.

첫째, 마음의 두레박을 품고 사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변화가 심한 것도 없다. 하루에도 수백 번 금방 흐렸다 개었다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우울할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두레박으로 마음을 끌어올려 보는 것이다.

둘째, 이해(理解)라는 사다리를 품고 사는 것이다. 예쁜 사람보다 미운 사람이 더 많은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밉다는 것은 그 사람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지? 남을 미워하다 보면 결국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럴 때 이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는 것이다. 상대방보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면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인생이 밝아짐을 알 수 있다.

셋째, 상상력의 쌍안경을 품고 사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팍팍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꿈을 꿀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오랜 감금생활에서 석방된 러시아의 인권운동가 솔제니친의 첫 마디는 “상상력이 나를 살렸다!”였다. 상상력의 쌍안경을 써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다른 모습이 보일 것이다. 쌍안경에 나와 다름이 보일 때 바로 우리의 인생이 찬란해진다. 눈이 제 눈을 보지 못하고 거울이 제 자체를 비추지 못한다.

중생(衆生)은 아상(我相)에 가려 제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의 시비만 보인다. 그러나 중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타를 초월하여 자기를 살피므로 자타의 시비를 바르게 알 수 있다. 치우치면 도(道)가 아니다.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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