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천하농판이면 어떠리?

농판(農辦)이라는 말이 있다. ‘멍청이’를 지칭하는 전남지방의 방언(謗言)이다. ‘실없는 장난이나 농담이 벌어진 자리, 또는 그런 분위기’나 실없고 장난스러운 기미가 섞인 행동거지,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농판이라는 말이 참 매력이 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가져도 좋고 가지지 못해도 좋다. 오는 것은 오는 대로 좋고, 가는 것은 가는대로 좋다. 무슨 도사나 도인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이런 마음 하나면 언제든 자유롭고 덕복(德福)하다.

농판은 남보다 키가 작을 수도 있고, 실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재산이 적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이 어눌(語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단점을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 역시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행여 내 단점을 남에게 들키지 않을까, 비웃음 사지 않을까 하며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자칫 이런 생각이 열등감의 늪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열등감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자신의 판단보다 주위 시선에 신경을 쓰게 만든다. 열정은 점점 사라지고 심리적인 균형을 깨뜨려 자신감을 상실하게 한다. 아흔아홉 가지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괜찮다. 그것을 뒤집을 만한 장점 하나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면 충분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원불교의 주산(周山) 박용덕 교무가 쓴 책 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밤에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저쪽에서 불을 비춰오면 이쪽에서 불을 끄든지 낮추어야 서로 충돌이 안 되는데 좁은 길에서 서로 비치면 사고가 나고 만다. 우리 못난 중생은 10촉을 가지고도 1000촉을 비치려고 하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제 촉수가 10촉이면 그 촉수를 끄고 1000촉을 보면 다 볼 수 있는데 제 촉수를 안 끄면 저쪽 밝은 것을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남의 촉수를 알려면 자기의 촉수를 꺼버려야 한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 같으신 큰 부처님도 외부에서 이름난 분이 오면 당신의 촉을 꺼버리셨다. 그리고 “저는 공부도 잘 못 하는데 동지들이 따라와서 공부한다고 하여 그렇지 제가 뭘 알아서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선생께서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면 그 사람이 처음에는 말을 잘 하다가 나중에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 한다. 일본에서 어떤 학자가 와서 소태산 부처님을 뵈었다. 그런데 촌노인 같이 보이므로 처음에는 가르치려 하다가 나중에는 “부처님이 저 어른이시다. 우리 중생이 저 부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하고 감명받고 간 일이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촉수를 끄시는데 중생이 촉수를 안 끄고 자기 촉수로 자랑하려 한다. 그 촉수를 꺼야 한다. 밤이면 항시 등을 켜지 말고 ‘존야기(存夜氣)’해서 촉수를 키워야 한다. 밤낮없이 쓰기만 하면 심지가 다 타버린다. 심지가 타버리면 무명업식(無明業識)이 가리게 된다.

대산(大山) 김대거(金大擧) 종사도 농판에 대한 말씀을 하였다. “대도인은 열 사람 중 8, 9명은 자기 능력을 숨기므로 농판 같고 병신 같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보통 사람이 대 도인을 알아본다고 아무리 장담해도 두 수만 높이 점을 놓으면 다 의심하고 떨어진다. 대 도인을 알아본다고 장담 말라.” 사람들은 도인들이 줏대가 없어 보이기 쉽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물같이 바람 같이 지조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본디 그 바탕에는 변함이 없는 무서운 저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소태산 부처님의 법설에 곡을 붙인 노래가 있다. “집에 들면 노복(老僕) 같고/들에 나면 농부 같고 /산에 나면 목동 같고/길에 나면 고로(古老) 같이 /그렁저렁 공부하여/천하농판 되어 보소 /천하농판 되는 사람 / 뜻 있게 하고 보면 /천하제일 아닐런가 /천하제일 아닐런가.” ‘농판’이란 전라도 사투리로 둘러먹기 좋은 시골에 사는 어수룩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알고도 모른 체하면 성인이요, 모르고 속으면 농판이라 하였다.

대산 종사님은 이런 말씀도 하였다. “참판보다 농판이 결국에는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도인은 농판이 되고 목침이 되어야 한다. ‘나’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삼대(三代) 농판 뒤에는 대인이 나온다. 둘러 먹힌 뒤에는 덕이 쌓인다.” 전라북도 좌포에 ‘맨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평생 머슴살이하며 새경도 받지 않고 지냈다. 사람들은 한 번도 반찬투정 하는 법 없는 그 사람을 맨밥이라고 불렀다. 반찬이 있건 없건 불평 없이 잘 먹는 그 사람의 별명이 ‘맨밥’이 된 것이다. 그는 항상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입으며 일만 했다. 주인 집 일을 너무 알뜰히 보살피기 때문에 그 집 제사 일과 그 외 여러 가지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서 주인이 물어볼 정도가 되었다.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또 바보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일생을 살다 떠났다. ‘맨밥’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후에 성인들이 그 사람을 보고 “재색 명리가 공(空)한 큰 도인이 다녀간 것 같다. 세상에는 숨은 도인이 많은 법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어수룩해도 심법(心法)만 잘 쓰면 그 심법이 생활에 다 드러난다. 그리고 대중들이 후일 그 심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무 야박하고 경위지고 자신의 이익만 차리려 하면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외톨이 늑대가 될 우려가 있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과 부드럽고 너그러운 언행을 해야 한다. 제가 스스로 높은 체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낮아진다. 그리고 항상 이기기로만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지게 되어있다. 천하농판으로 살면 신관이 편안하고 넉넉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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