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⑪ 몽골침략시대와 아바시드왕조의 멸망
지난 회엔 8세기 초부터 15세기까지 약 700년에 걸쳐 스페인을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 시대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에는 다시 시간을 2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서 스페인에서 동쪽으로 4000km 넘게 떨어진 아바시드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바시드 왕조는 지난 번 압달라흐만의 기구한 운명을 얘기할 때 잠시 말했지만 이란 북부 지역에서 발흥한 새로운 세력이 우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기 750년에 세운 또 다른 이슬람 왕조이다. 아바시드 초기 지도자들은 수도를 쿠파(이라크 남부 도시)에서 바그다드로 옮겼고 8세기 말 하룬 알 라시드 5대 칼리프 치하(786-809)에서 최고의 문화 황금기를 누린다. 하룬 알 라시드는 우리가 어렸을 적 친숙하게 읽었던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한밤중에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고 바그다드 시내를 시찰하면서 어려운 백성들을 돕는 자상한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바그다드가 어떻게 문화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이자 그의 뒤를 이어 7대 칼리프를 지냈던 알 마문(813-833)의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페르샤인들은 지난 수천 년에 걸쳐 문명을 발전시켜왔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아랍인들을 필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아랍 지배자들은 기껏해야 1~2세기를 통치했을까 말까 하는데 페르샤 관료들이 없으면 한 시간도 못 버틴다.” 물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그의 모친이 페르샤 출신이었기 때문에 손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로마제국보다도 더 큰 영토를 다스리게 된 아바시드 왕조는 전성기를 지나자마자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해서 서쪽으로는 모로코(이드리시드), 튀니지(아글라비드), 이집트(툴루니드)에 각기 독자적인? 왕조를 세워서 떨어져 나가고 동쪽으로도 이란(부이드), 아프가니스탄(사파리드), 우즈베키스탄(사마니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결국 10세기 중반 아바시드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조차 페르샤계 부이드 왕조에 의해 정복되는 운명을 맞이했으나 왕조의 명맥은 계속 잇고 칼리페이트의 지위도 명목상으로 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등장
이렇게 근근이 이름만 남아 있던 아바시드 왕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다름 아닌 몽골군이었다.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1년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차츰 서쪽으로 공격대상을 옮겨갔다. 1219년 몽골군은 오늘날의 이란과 그 북쪽의 ‘스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투르크계 크와라즘 샤 왕국을 격파하고 여기서 수십 만 명을 살해하여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징기스칸이 1227년 사망한 후에도 그의 손자 훌라구는 이슬람권 침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 공격을 감행하여 어렵잖게 도시를 점령하고 80만에 달하는 시민을 모두 죽이고 이들의 시체를 성밖에 켜켜이 쌓아놓아 수 천km나 떨어져 있는 유럽인들까지 벌벌 떨게 만들었다. 바그다드 정복 당시 이들은 아바시드 왕조 최후의 칼리프였던 알 무스타심을? 카펫에 둘둘 말아 말발굽에 치여 죽게 했다.
그냥 칼로 쳐서 죽이지 왜 번거롭게 그런 복잡한 방법을 택했느냐 하면 몽골인들은 아무리 자기의 적이라고 해도 왕족을 죽일 때 피를 보면 재앙이 닥친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결국 바그다드는? 몽골의 침입 당시 도시 안팎에 건설해 놓았던 수많은 수로를 몽골 병사들이 다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그 후 한 번도 과거의 영화를 재연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아바시드 왕조도 알 무스타심이 카펫 속에서 만신창이로 뭉개지는 운명을 맞이한 시점에서 끝장이?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이슬람권 침략에 대해 오늘날 미국 최고의 중동역사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버나드 루이스는 몽골의 이슬람권 침략이 바그다드와 이라크 지역을 제외하고는 단기적 피해만 끼쳤을 뿐 중동지역 전체를 단일시장으로 통일시킴으로써 무역과 아이디어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긍정적 효과를 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타이거 맘’으로 유명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예일대 법대 교수를 지내고 있는 에이미 추아(Amy Chua) 또한 자신의 저서 <Day of Empire>에서 몽골제국이 피지배지역 주민들에 대해 펼친 ‘관대한’ 정책에 대해 노래를 부른 바 있다. 그러나 그런가? 당시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물어봐라 정말 그런지.
훌라구는 바그다드 점령의 여세를 몰아 내친 김에 이집트까지 침략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맘루크(‘맘루크’란 노예라는 뜻으로 13세기 중반부터 이집트를 지배해온 일종의 노예출신 군사정권으로 고려말기의 최충헌 같은 무신정권 정도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로서 술탄의 지위에 있던 카이로의 쿠투즈에게 서한을 보내 무조건 항복을? 하라고 요구를 했다. 이에 대해 쿠투즈는 떨기는커녕 겁도 없이 서한을 전달하러 온 사신을 살해하고 그의 목을 카이로 성문 위에 내거는? 것으로 대꾸했다. 당연히 훌라구는 이에 대해 대노했으나 당장 공격에? 나서지는 못하고 대칸(大汗) 몽케의 사망 이후 후계자 선정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본국으로 급거 달려가고 이집트 침략전쟁에 파견할 병력을 단 1만~2만명만 남겨두는 전략적 실책을 저질렀다. 훌라구 대신? 남은 몽골의 장수 키트부가는 쿠투즈가 이끄는 맘루크 병사들과 예루살렘 부근의 아인 잘루트에서 맞섰으나 결과는 맘루크 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키트부가는 생포되어 결국 나중에 처형되는 운명에 처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의 승리는 당연히 칼리프 알 무스타심의 죽음에? 대한 이슬람권에서의 속시원한 앙갚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필자가 아인 잘루트 전투에 대한 역사를 맨 처음 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집트 여행을 할 당시 가이드였던 라파라는 중년남성이 카이로의? 모스크들과 씨타델을 보여주면서 신나게 설명을 해줬던 때였다. 그는? 그러면서 이집트인들이 아니었다면 몽골군(그는 몽골을 언급할 때마다? ‘무갈’이라고 불러서 나중에 알고 보니 몽골의 아랍식 발음이 무갈이라고 한다)이 유럽까지 침공했을 것이고 그러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유럽문명이 존재했을 수 있었겠느냐며 의기양양해 했었다.
그러나 아인 잘루트 전투를 야만인들로부터 서구문명을 지켜낸 또 다른 포이티에 전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서유럽을 오토만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영웅 라자르 왕자(세르비아)를 오늘날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또 15세기 발칸반도로의 오토만 침입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왈라치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역사상의 실명은 블라드 ‘Vlad the Impaler’였고 오토만 포로들을 잡아들이는 족족 나무 끝을 뾰죽하게 깎아 항문에서 입으로까지? 쑤셔넣어 고통은 극에 달하지만 죽을 때까지는 며칠이 걸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형벌을 워낙 잘 구사해서 후세까지 그 악명이 흡혈귀로? 남게 된 것이다)은 어떤가? 역사는 쓰기 나름이고 특정 역사적 인물의 공적은 만들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