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⑥모하메드 메카 재입성, 아내 무릎 베고 눈 감아
모하메드가 그의 동조자들과 함께 메카 지배세력들의 탄압을 피해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긴 서기 622년 ‘헤지라’에 대해 지난 글에서 소개했다. 이번에는 그 후 무슬림들이 코레쉬족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내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쌓고 결국엔 메카에 무혈 입성을 하며 마침내 632년 모하메드의 사망에 이르는 시기까지 서술하기로 하겠다.
코레쉬 내통한 유대인 800명 처형···일부 학자 “유태인-무슬림간 갈등 시작” 해석도
헤지라가 있은 이후 무슬림 커뮤니티는 메디나에서 자리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코레쉬 부족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 두 세력은 바드르 전투에서 맞붙었으며,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코레쉬 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한편 바드르전투 직전에 코레쉬 편을 들며 무슬림들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장했던 메디나의 유태인 부족들은 전투가 끝난 후 메디나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헤지라 3년(서기 624년) 후에 코레쉬 부족은 다시 300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우후드 전투)했고 이번에도 무슬림들은 3대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코레쉬를 격파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일부 병사들이 모하메드의 명령을 어기고 적들을 추격하여 전리품을 노획하려다가 되돌아와서 반격을 시도하는 코레쉬 병사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고 모하메드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우후드전투가 끝난 후에 무슬림들을 배반하고 코레쉬 편을 들어 내통했던 또 다른 유태인 부족이 추방을 당한 바 있다.
우후드전투가 있은지 2년 후에 코레쉬는 3차 공격(참호전투)을 개시했다. 이들은 1만의 병력을 소집하여 메디나로 몰려가 도시를 포위하고 무슬림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도시 주변에 참호를 길게 파서 여기에 불을 질러 코레쉬 병력의 접근을 막는 전략으로 대응했다. 결국 코레쉬는 기다리다 지쳐서 결국 메카로 되돌아갔고 이번에도 세 번째 유태인 부족인 바누 쿠라이자가 코레쉬와 내통을 하는 것이 발각됐다. 이들은 자신들도 과거처럼 추방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모하메드는 다른 메디나 지도자들과의 기나긴 논쟁 끝에 쿠라이자 부족 남성 800명을 처형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넘기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놓고 오늘날까지 일부 유태인 학자나 서구 학자들은 이를 무슬림-유태인 간 불화의 근원으로 간주하거나 이슬람 종교가 얼마나 잔혹한지를 잘 보여주는 초기의 사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슬림-유태인 간의 반감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씨어도어 허츨 같은 유태인 지도자들이 주창한 시오니즘운동에 동참하여 유럽거주 유태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정착하고 1947년 이스라엘이 공식 독립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거기에 더해 메디나의 쿠라이자 부족들은 원래 인종적으로 유태인이 아니라 유태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는 아라비아 반도 토착인들이었다고 한다. 또 7세기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 적과의 내통은 모두 사형 또는 노예신분으로의 격하가?당연한 처벌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그 전에 두 유태인 부족을 처형시키지 않고 추방으로 끝낸 것이 더 이례적이었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Reza Aslan, NogodButGod, pp.91~94참조).
참호전투는 엄격하게 말하면 무승부이긴 했으나 워낙 코레쉬 부족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만 해도 패배나 다름없었고 이에 따라 아라비아반도의 모든 부족들은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즉 모하메드가 이끄는 메디나의 신흥 세력은 천하무적이며 이들의 뒤를 돌봐주는 신 또한 대단한 파워를 지닌 것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모하메드를 죽이는 것 또한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됐다.
그럼에도 모하메드는 이전의 예언자들처럼 초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고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신도들을 얻어나갔다. 서기 7세기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개화되어서 비바람을 부르고 바다를 가르는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졌고 말씀 자체가 기적처럼 여겨지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슬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식은 독특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무슬림들이 코란을 낭송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키라우트’(qira’ut)는 음악적인 발성법이긴 했지만 음악과는 또 다른 면이 있었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부르는 성가와도 차이가 있었다. 즉 비신자가 듣기에도 낭송하는 코란의 내용뿐 아니라 그 소리로부터도 특별한 감흥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도 코란이 다른 언어로의 번역본이 많이 있지만 아랍어 버전만큼 권위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코란 낭송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이슬람 초기 에피소드는 오마르(나중에 2대 칼리프로 등극한 인물)가 어떻게 개종했는지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마르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질이 급해서 마치 삼국지의 장비와 유사한 인물인데 그 또한 당시 메카의 지배계층이던 코레쉬족 출신 엘리트의 하나였다. 그런 자가 무하마드를 죽이려고 메카 저자 거리로 나서다가 자기 여동생이 나무 밑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코란을 낭독하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모하메드 가르침의 또 다른 특징은 아라비아 반도가 전통적으로 부족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단 무슬림이기만 하면 부족간 차이를 떠나 모두 형제 사이임을 강조하여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이슬람의 가르침이 평화만을 내세우고 폭력은 금기시했다는 건 아니고 다만 그런 전투적 에너지를 이슬람권(Dar al-Islam) 바깥으로 돌리게 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메카 다시 입성 후 메디나서 최후 맞아
참호전투가 있은지 2년 만에 모하메드는 어느 날 꿈속에서 자신이 메카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을 드리는 이미지를 보게 됐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부관들에게 다들 짐을 싸서 메카로 순례를 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400명의 무슬림 신도들을 이끌고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메카 성문 앞으로 나아가 도시 지도자들을 상대로 “금년에는 순례를 할 수 없고 대신 내년에 다시 오면 평화적으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이는 메카가 모하메드에게 완전 손을 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헤지라 6년에 무슬림들은 메카로 가서 카바신전을 참배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메카 지도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도시를 모하메드에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모하메드는 곧 카바로 가서 그곳에 모셔져 있던 모든 우상들을 때려부수고 검은 운석이 모셔져 있는 이곳 카바를 이슬람 최고의 성소로 선언했다. 이로써 사실상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 종교이념 하에 완전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됐다.
헤지라 10년(서기 632년) 모하메드는 메카에 최후의 순례를 갔고 인근에 있는 아라파트 산정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여기서 모든 무슬림의 생명과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며,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인정했다. 또 무슬림들 간에는 어느 누구도 신분 고하가 일체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 자신이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그 이후에는 어떠한 계시도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메카 설교에서 메디나로 돌아온 직후 모하메드는 병에 들었고 얼마 가지 않아 애처이자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 아부 바크르의 딸인 아이샤의 무릎 위에 머리를 놓은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