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⑨ 이슬람 세력의 스페인 정복

지난 번 글에서 알리와 후세인의 사망, 그리고 라쉬둔 시대의 종막과 우마야드 왕조의 창건까지 얘기했었다. 이번엔 그로부터 수십 년을 건너뛰어 우마야드왕조 치하에서 이슬람 세력이 서진(西進)에 서진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모로코 서부 대서양 해안까지 닿게 되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북쪽으로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침공하는 역사를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옛날 역사에 어두운 일부는 “엉, 스페인이 언제 아랍인들 지배하에 놓였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은 1492년 그라나다의 무슬림 왕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무려 800년이 가까운 시일에 걸쳐 이슬람제국의 엄연한 일부(물론 750년 아바시드 왕조가 세워진 다음 바그다드 지배층들과는 담을 쌓고 지내긴 했지만)로서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바 있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해 대체적인 감을 잡길 원한다면 1960년대 영화로 좀 오래 되긴 했지만 찰튼헤스턴이 주인공으로 나온 <엘시드>(El Cid)를 빌려보도록 한다.

‘제벨타리크’와 ‘지브롤터’

아랍 정복자들은 이집트 점령(640년대)을 한 이후 북아프리카 서쪽으로 계속 말을 달려 튀니지(670년), 모로코(700년대 초)까지 평정할 수 있었다. 모로코를 점령한 지 몇 년이 안 되어서 당시 탄지에(스페인을 마주보고 있는 모로코 해안도시)에 주둔해 있던 타리크(Tariq ibn Ziyad)는 다마스커스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라 베베르 병사들을 거느라고 해협을 건너 정찰을 몇 차례 나갔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711년에는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비시고트 족의 왕 로데릭(로드리고)을 대패시키고 스페인 거의 전역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현재 대서양과 지중해 경계에 위치한 지브롤터에 돌출한 산 이름을 ‘제벨타리크’(타리크의 산)라고 명명했고 스페인 현지인들의 발음을 따라 오늘날 ‘지브롤터’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편 타리크보다 1년 전에 400명의 베베르 병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략을 시도했던 타리프(TarifibnTalib)는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도시’ 타리프 이름으로 남게 된다.

그러면 이 대목에서 누구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그 옛날에 아무리 경비가 허술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 국가가 한줌의 군사들에 의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복됐나? 한 가지 학설에 따르면 당시 비시고트 치하 씨우타(모로코 해안도시로 현재도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다) 총독을 지내던 줄리안의 딸 플로린다가 톨레도에 유학을 가서 궁중 매너를 배우던 중 비시고트왕 로데릭의 유혹을 받아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분개를 한 아버지 줄리안이 모로코 주둔 아랍 정복자들과 공모하여 스페인 정복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말고도 8세기 초에 이미 스페인은 반달족(비시고트족과는 사촌격인 또 다른 ‘야만’족)의 침입으로 거의 초토화된 상태로서 국력이 쇠잔한 상태에서 기껏해야 1천명 남짓한 무슬림 병력의 침입으로 쉽게 무너졌다는 학설도 있다.

스페인 북서부 작은 땅뙈기를 제외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거의 차지하게 된 이슬람 세력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스페인 땅을 ‘알 안달루스’라고 명명하고 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프랑스 중앙부로까지 진출하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732년 포이티에 전투(또는 투어 전투)에서 압둘 라흐만 가피키 대(對) 찰스마텔(Charles the Hammer)과의 대결 끝에 프랑크왕국의 승리로 끝나고 무슬림들의 유럽 영토 확대는 여기서 끝이 나게 된다.

이에 대해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자신의 불멸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과장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만약에 포이티에 전투에서 찰스 마텔이 무슬림 병사들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어쩌면 코란의 가르침을 옥스포드에서 강의하고 마호메트가 계시받은 것들을 할례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리인 듯이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른다.”

한편 스페인 북서부 구석에 몰리게 된 구 비시고트 지배세력은 기독교를 믿는 토착민들과 손을 잡고 조용히 힘을 길러 게릴라식 전투를 통해 조금씩 영토를 늘려 나가면서 결국엔 ‘실지회복’(Reconquesta)에 성공하게 된다.

알 안달루스 대 유럽

다마스커스 소재 우마야드 왕조는 코라산(오늘날의 이란 북부 및 투르크메니스탄 일부)에서 발흥한 새로운 세력에 의해 750년 멸망하게 된다. 아바시드 병사들은 어디를 가든지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검은 두건을 쓰고 다닌다고 해서 당시 중국 당나라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검은 옷을 입은 대식가들’(黑衣大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바시드 세력은 구 왕조의 잔류 혈족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칼리프 히샴의 손자인 압달라흐만 왕자는 아바시드 혁명이 일어나던 750년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아바시드 병사들이 쳐들어오던 날 왕궁 안에 쳐놓은 텐트 밑에서 자신의 네 살짜리 아들과 아무 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갑자기 동생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이렇게 전했다. “형님, 반군들이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소. 빨리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소서.”

시종까지 합쳐서 네 사람은 벌써 피비린내에 불길이 치솟고 있는 왕궁을 다행히 빠져 나왔으나 자신들을 죽이려는 병사들이 바짝 뒤를 쫓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 강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압달라흐만은 수영을 할 줄 알아서 겨우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지만 수영이 서투른 동생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탄 병사의 칼에 단번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네 살배기 아들 술레이만의 운명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기록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압달라흐만은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우마야드 잔류파들의 도움으로 은신해 있다가 이집트로 가고 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모로코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이 당시의 생활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 발이 땅에 닿아 있던 적이 거의 없었고 언제나 날아다녀야 했다.” 자신의 모친이 모로코 베베르족 출신이었던 덕택으로 그는 모로코의 네프자 부족들의 보호를 받아 기력을 회복하고 나중에는 그곳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게 된다. 756년 권력 장악에 성공한 압달라흐만은 그때까지 다마스커스의 식민지에 불과했던 스페인을 에미레이트로 만들고 자신의 칭호도 ‘에미르’로 정하면서 아바시드 왕조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압달라흐만(756-788)과 샤를마뉴 대제(768-814)는 거의 동시대 인물로 곧잘 대비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비교는 당시 유럽의 후진성과 무슬림 스페인의 세련된 문화 간의 대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수도 코르도바는 모스크(메즈퀴타)에 더해 수많은 화려한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던데 비해 샤를마뉴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던 아헨(벨기에-네덜란드와 인접한 독일의 도시)은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시골 성에 불과했다.

거기에 더해 이미 제지(製紙) 기술을 습득하여 수천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코르도바의 도서관에 비해 아헨의 도서관은 두꺼운 양피지로 만든 수백 권의 책만 소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샤를마뉴가 거의 문맹에 가까워서 라틴어로 쓰여진 책을 읽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반면 압달라흐만은 금요일 기도회에서 설교까지 주재할 정도로 높은 교양을 갖췄다는 얘기가 있다.

더구나 스페인이 이미 농업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경제가 자리잡았다면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유럽은 여전히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남들의 재산과 토지를 빼앗아 축재하는 약탈경제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스페인은 화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던 반면 유럽은 교환경제에 머물렀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당시 스페인과 프랑크왕국 간의 문명수준이 무려 400년 차이가 났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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