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⑩ ‘알 안달루스’의 역사적 의의

전편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모로코까지 휩쓸어버린 뒤 이번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까지 차지하고 그로부터 50여년 만에 압둘라흐만이라는 구 우마야드 왕자가 알 안달루스 에미레이트를 세우는 역사까지 알아봤다. 오늘은 그렇게 세워진 알 안달루스가 이후 유럽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망한지 500년도 넘는 지금에 와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유럽의 정체성

샤를마뉴는 778년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자라고사(피레네산맥 남쪽 스페인 영토 내의 도시)를 공격했으나 성 함락에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부근 지역을 약탈하여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론세발레스 고개를 넘어 프랑스로 가던 중이었다. 당시 대열 후방에서 전리품 수송을 책임지던 샤를마뉴 휘하의 장수 롤랑드는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바스크 주민들을 이기지 못하고 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이 일이 있은 후 200년이 넘은 후에 프랑스의 한 음유시인은 ‘Shanson de Roland’(Song of Roland)라는 장편서사시를 지었다. 이는 유럽 전역에 걸쳐 여러 언어로 옮겨져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 서사시에서는 실제 역사상으로는 바스크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한 롤랑드를 알 안달루스를 통치하던 사라센 왕 마실레의 기습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바꿔치기 한다.

무려 4000행에 달하는 이 장편 시에 따르면 자신이 아끼던 장수를 잃은 샤를마뉴 대제는 마실레에 대해 보복을 가하고 결국 마실레를 도우러 온 바빌론의 에미르 벨리간트(아바시드제국의 칼리프일 가능성이 높다)까지 무찌르는 대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실레의 아내 브라미몬드는 자라고사 성문을 열어젖히고 프랑크 군 앞에 항복을 하는 것에 더해서 나중에는 기독교로 개종까지 하기에 이른다.

스토리 자체는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무슬림 스페인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유럽인들이 그전까지 전혀 갖지 않았던 유럽 정체성(Europenses)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선 이 서사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듯 어느 민족이든 서로 간에 차이를 극복하고 동질감을 갖게 하기 위해선 실제로든 가상이든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고 하겠다. 필자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세계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외계인이 지구를 침입한다고 소문을 내고 모든 지구인들 간에 단합을 할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압달라흐만이 통치하던 8세기 중반 이후 코르도바는 당시 바그다드와 당나라의 창안(長安)과 맞먹는 세계 최고의 문화중심이었다. 이곳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하여 이름을 날린 철학자 겸 신학자 이븐 루시드(Averroes, 1126-1198) 외에도 코르도바의 집현전 격인 ‘바이트 알 히크마’에는 마이모나디스(1135-1204) 같은 유태인 학자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시대의 철학, 과학, 신학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이는 나중에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거대한 지식의 ‘컨베이어 벨트’ 역할을 했다.

리콩퀘스타

스페인의 기독교세력은 8세기 초 서북부 구석 아스투리아스 중심으로 미약한 세력을 유지하다가 844년 갈리시아 지역에 성 제임스(산티아고)가 기사복장을 하고 현신하여 그 후부터 이교도 축출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갈리시아에 성(聖)제임스가 나타난 지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명명되고 성 제임스는 ‘산티아고 마타모로스’(무어족 킬러 성 제임스)라는 별명까지 붙게 된다. 지금도 카미노 산티아고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카톨릭신자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기독교세력이 1492년 무슬림들을 완전히 몰아낸 이후 이사벨라여왕과 페르디난드 2세는 무슬림, 유태인 등 이교도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은 종교재판의 중심지가 될 정도로 기독교 근본주의 이념에 충실해서 과거 알 안달루스 시대의 종교적 관용의 분위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리콩퀘스타 완결이 있은 지 100년도 안 되어서 스페인의 기독교 왕들은 이교도들에게 개종, 추방, 죽음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강요받았다. 개종을 선택한 무슬림, 유태인들은 각각 모리스코, 마라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당하고 종교재판의 가장 만만한 희생자가 됐다. 한편 스페인을 떠난 무슬림들은 일부는 이슬람권으로 갔고 또 일부 유태인들은 당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 관대했던 네덜란드 등지로 이주해야 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던 이교도들을 다 잃게 되고 이로 인해 농업생산성이나 제조업 수준면에서 엄청난 퇴보를 겪어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 왜 스페인 통치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을까? 이는 어떻게 보면 스페인이 문명의 충돌 최전선에 서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스페인 카톨릭 통치자들의 심정은 가끔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휴가 와서 “우리는 겨울철 혹한에 휴전선 지키느라 고생하고 매일 북한의 위협에 시달리는데 너희 후방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맘 편하게 잘 사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이들 입장에선 알 안달루스와 한참 떨어진 독일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기독교 종교개혁 움직임은 사치스런 투정처럼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럼 오늘날에 와서 알 안달루스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지난 2009년 뉴욕시 모스크의 이맘 파이잘 압둘라우프는 9.11 테러사건 당시 무너져버린 세계무역센터 부근에 13층 건물의 코르도바 하우스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이미 위의 알 안달루스 역사를 읽었으면 알겠지만 코르도바라는 이름은 종교적 관용(또는 ‘Convivencia’)을 상징하는 이슬람 스페인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었다. 이 건물에는 모스크에 더해서 박물관, 종교간 대화의 장 등을 마련하여 종교화합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9.11 희생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악의적인 계획이라고 반대하고 일어났다. 결국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2011년 9월 이 건물은 완공을 보고 개장을 했으나 아직까지도 논란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코르도바의 모스크(메즈퀴타). 리콩퀘스타가 있은 후부터는 카톨릭성당으로 개조되어 지금까지 성당으로 쓰이고 있지만 말발굽 모양의 기둥양식을 보면 영락없는 모스크 건물이다.

1509년 라파엘이 그린 ‘The School of Athens’에는 이븐 루시드(왼쪽 터반을 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인물)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쟁쟁한 인물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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