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④모하메드의 탄생과 청소년시절
지난 글에서?이슬람종교가 창시된 서기 620년대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와 주변지역 상황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에는 모하메드의 탄생으로부터 그가 40세 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듣고 ‘득도’를 한 시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자.
아무리 이슬람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모하메드가 서기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고 여섯 살 때 모친마저 잃고 고아가 됐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이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에서도 고아가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남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될까 말까 한데 혼인에서 비즈니스 거래에 이르기까지 “쟤가 뉘집 자식인가?”를 꼼꼼하게 따지던 7세기 아랍사회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메카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던 하심 가문(Banu Hashim) 출신이었어도 고아였기 때문에 당한 설움은 어쩔 수 없었고 그런 대표적인 사례는 한때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사촌 움 하니와의 혼담이었다. 집안의 반대로 둘은 결국 혼인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움 하니는 그럼에도 모하메드와 평생에 걸쳐 좋은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모하메드는 삼촌인 아부 탈리브 집안에 입양되어 25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메카를 중심으로 다마스커스, 가자 등지와 대상(카라반) 무역거래를 하던 삼촌을 따라 주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 보통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 기껏해야 반경 20km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이렇게 삼촌 덕택으로 세상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까닭에 그는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유행하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아이디어들 가운데는 정치, 사회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것으로 유태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가르침에 일찌감치 눈을 뜰 수 있었다.
과학이나 철학, 신학 등 어떤 분야를 불문하고 세상에 어떤 아이디어도 그 사상이 태어난 사회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슬람 종교 또한 마찬가지여서 7세기 초 당시에 알려져 있던 주요 종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어떻게 보면 이들을 집대성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슬람이 유태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 초기에 예루살렘 쪽으로 향해서 기도를 드리고 남자아이들의 할례를 의무화하며, 돼지고기 등 금기음식을 정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비판적인 일부 신학자들은 이슬람이 서기 325년 니케아공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받은 아리아니즘(Arianism)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여기서 기독교란 개신교와 가톨릭의 결별 훨씬 이전의 개념)는 공통점이 많다.
참고로 아리아니즘이란 알렉산드리아(이집트)의 기독교 주교였던 아리우스가 내세웠던 종교원리로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원리를 부정하고, 따라서 예수의 신성성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했던 초기 기독교의 한 계파이다.
범상찮은 조짐···구름이 모하메드 머리 위 햇볕을 가려주다
모하메드가 어렸을 적부터 뭔가 범상치 않다는 조짐은 여러 차례 있었고 이는 후세 이슬람 역사가들이 기록으로 남겨놓았던 바 있다. 8세기 아바시드 왕조 시절 역사가였던 이븐 이샤크의 기록에서는 그런 일화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모하메드가 열두 살 되던 때 삼촌을 따라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보스라(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도시)를 여행하던 중 ‘바스라’라는 이름의 기독교 수도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미 아부 탈리브가 이끄는 대상이 먼지를 일으키며 도시로 다가오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다른 모든 여행자들이 뙤약볕을 그대로 쬐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던데 반해 한 소년의 머리 위에만 작은 구름이 따라다니며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히라는 아부 탈리브를 만나자마자 모하메드가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로 이런 사실을 남에게 절대로 알리지 말고 특히 그리스-로마계 사람들(또 다른 속설로는 유태인들)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 남다른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모하메드의 청년시절은 종교적 신비로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메카의 다른 재능 있는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무역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또 이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가 20대 초반부터 정직하고 장사수완이 좋기로 업계에 소문이 났고 급기야는 당시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졌던 카디쟈라는 중년 과부로부터 사업 제안을 받게 된다. 모하메드는 이를 멋지게 처리해내고 카디쟈의 재산을 몇 배로 불려주게 되어 결국은 15세 연상인 그녀로부터 정식 청혼을 받고 수락하게 된다. 이들의 24년에 걸친 결혼생활 동안 모하메드는 당시 아랍사회에 일상적이던 첩 들이기를 거부하고 일부일처제를 고집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디쟈와의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과 그 후 계속 이어지는 사업 성공으로 모하메드는 40세가 되던 610년경에 이미 메카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유지로 인정을 받고 분쟁이 생길 때마다 이를 공정하게 해결한다는 평판까지 얻게 됐다. 보통사람들은 그 정도 했으면 인생에 만족을 하고 손주들 재롱이나 보면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을 텐데 모하메드의 인생은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