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⑧ 수니-시아파 갈등의 근원
지난번 에피소드에서는 이슬람의 창시자 모하메드가 사망한 때까지 서술했다. 이번에는 모하메드 사후 그가 세운 종교커뮤니티를 뒤이어 이끌어가게 된 소위 ‘라쉬둔’(rightly guided ones) 칼리페이트시대(632-661)에 대해 설명하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과 반목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언급하기로 하겠다.
모하메드는 생전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가 사망한 직후 잠시 혼란이 일었다. 모하메드의 최측근 동반자 아부바크르는 동료들을 모아놓고 후계자선정 회의를 가졌고 그는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오마르와 또다른 한명의 동반자를 지목하고 이 둘 가운데 하나를 후계자로 선정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오마르는 자신과 같이 미천한 자가 후계자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고 읍소하며 오히려 아부바크르가 더 적격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참석자들은 아부바크르를 만장일치로 칼리프(이슬람사회의 종교정치 분야를 총괄하는 최고지도자)로 선정했다.
불운의 사나이, 알리
아부바크르의 초대 칼리프 추대는 그때까지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알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에게는 통보도 없이 긴급회의를 열어 뚝딱 후계자를 결정해 버렸으니 섭섭해 할만도 했다. 그는 모하메드보다 30살 연하였지만 둘은 사촌사이였고 모하메드가 고아로 삼촌 아부탈리브집에 살면서부터 둘은 가까운 형제처럼 지냈다. 더구나 알리는 나중에 모하메드와 카디쟈가 결혼하고부터 그 집에서 성장했고 모하메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사촌이자 장인-사위지간이기도 했다.
메디나로 도주(헤지라)할 때도 모하메드를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그의 침대에 들어가 있어서 시간을 벌어줬던 것도 알리였고 움마공동체가 거의 전멸위기에 처했을 때 코레쉬부족과 일대일 대결에 나서는 경우에도 알리가 자청해서 나가 그때마다 승리를 거둬왔다. 모하메드는 말년에도 알리를 가장 측근에 두고 모든 문제를 상의했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에게 알리를 자신의 대리인처럼 간주하라고 말하곤 했었다.
한편 아부바크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지금 당장 움마공동체에 필요한 지도자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침착한 판단력을 지닌 원로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아라비아사회에서 60살 원로를 제치고 30살 짜리가 지도자로 추대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알리가 모하메드와 같은 하심가문(바누하심)이고 따라서 같은 가문 사람이 지도자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 평등을 주창하는 이슬람정신에 위배된다는 논리도 제기됐다. 결국 코레쉬부족출신인 아부바크르가 더 적임자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알리는 2대, 3대(오마르, 오쓰만) 칼리프 선출시에도 가장 강력한 후보 물망에 올랐다가 번번이 떨어지는? 불운을 겪었다. 3대 칼리프 오쓰만이 통치 12년 만에 과도한 징세를 호소하러 메디나에 온 이집트 유지들에 의해 맞아죽고 그제서야 겨우 칼리프지위(35-41 AH)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알리는 칼리프 등극 직후부터 암살자들을 처벌하라는 오쓰만의 조카이자 당시 시리아총독을 지내던 무아위야로부터의 요구에 시달리게 되고 나중에는 심지어 모하메드의 젊은 아내 아이샤의 세력과 맞서 전쟁(낙타전투)까지 벌여야 했다.
알리는 무아위야 지지파와도 전쟁(657년 시핀전투)을 벌여 거의 승리 직전까지 갔으나 분열상을 보이는 무슬림커뮤니티?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그는 무아위야와 휴전협정을 맺고 동등한 지위에서 세력분할을 하는 정략적으로 보면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다.
무야위야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하고 알리는 수도 쿠파(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차지한다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 다수의 알리 지지파(시아)들이 불만을 갖게 되고 원칙론에 충실한 카라자이트계파들 또한 이에 실망하고 알리진영을 아예 떠나버렸다. 카라자이트들 가운데 젊고 혈기 왕성한 한 병사가 알리가 더 이상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믿음으로 그를 암살해 버렸다.
알리, 하산, 후세인, 카르발라전투
알리 추종자들은 그의 아들 하산을 후계자로 추대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무야위야는 하산에게 거액의 돈을 제시하면서 칼리프로서의 권한을 포기하라고 종용했고, 모하메드의 외손자인 하산 입장에선 돈이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이런 더러운 권력다툼을 계속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하산은 머지않아 사망(무아위야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도 있다)하고 칼리페이트를 장악한 무야위야는 라쉬둔시대를 끝장내고 우마야드왕조(661-750)를 창건하게 된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산의 동생 후세인이 쿠파의 일부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의 칼리페이트 왕권찬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이라크 바그다드로부터 남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카르발라에서 벌어진 전투(680)에서 쉽게 진압되고 후세인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어 그후부터 시아파 추종자들로부터 자기들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순교자로 떠받들여지게 된다.
알리와 그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이슬람 역사의 첫 시기인 라쉬둔 칼리페이트시대는 비극적인 종막을 고했다. 물론 이 시기는 히즈라에서 이슬람대제국 형성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간드라마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유혈사태와 동족상잔, 음모, 배반의 사례가 있었으므로 이를 이상사회의 전형으로 얘기하기는 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인물들은 적어도 개인적 명예나 재산을놓고 싸운 게 아니라 모하메드의 계시를 이 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놓고 정직한 노선투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라쉬둔시대는 역사적으로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후 우마야드, 아바시드시대는 그에 비하면 왕권세습 방식만 보더라도 다른 지역의 제국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시아파 추종자들은 이런 1300여년 전의 역사를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며 매년 이슬람달력으로 첫번째달(무하람) ‘아쉬라’ 날이면 알리와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모하메드의 직계손자를 짐승 도축하듯이 죽여버린 야지드의 야만적인 행위에 치를 떨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알리 사망 이후의 우마야드와 아바시드 왕조를 모하메드를 계승하는 정통후계자들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열한번째로 끝나는 이맘의 전통이 열두번째 은신한 이맘(은신을 한 지 1천년이 조금 넘었다)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물론 수니-시아 갈등이 알리와 후세인에 대한 푸대접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 후 지속적으로 갈등이 있어 왔고 특히 오늘의 이란땅에 사파비드(1502?1736) 왕조를 세운 샤이스마일이 왕조 창건 직후 국교를 시아이슬람으로 정하고부터 결정적으로 양계파가 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