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③비잔틴제국을 이긴 네 가지 이유
한때 히자즈사막에서 들쥐나 잡아먹고 살던 미천한 민족이던 아랍인들이 순식간에 힘을 모아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한 세기도 안 되는 기간 내에 스페인에서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어마어마한 위업을 달성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무슬림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전적으로 이슬람 종교 자체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큰 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반면 서구 역사학자들은 당시 비잔틴과 사사니드제국이 서로 끊임없는 전쟁 끝에 국력을 쇠진한 상태였고 내홍(內訌)으로 인해 아랍 침략이 없었어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슬람 자체의 파워보다는 오히려 주변 세력의 약화로 아랍민족이 어부지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물론 무슬림 학자들의 설명도 아전인수식이긴 하지만 서구학자들의 해석 또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모하메드와 초기 무슬림들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약간은 악의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확장을 설명하는 논리는 무엇일까? 대체로 다음 네 가지 성공요인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무슬림 병사들이 분명한 대의명분과 목적의식을 갖고 싸웠고 메디나에서 지도자로서 필요한 모든 미덕을 갖춘 칼리프(‘선지자 모하메드의 후계자 또는 대행자’라는 의미로 이슬람체제의 최고통수권자)들의 통치는 중국의 요순시대에 맞먹을 정도로 이상적 사회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적군의 입장에서 무슬림 세력이 각지에서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금이 저리고 이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소용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을 것이다. 또 피정복지 일반 백성들은 무슬림 정복이 있다 해도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민중 차원에서의 저항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이슬람 지배이념이 지도자 개인이 아니라 제도에 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밑에서 정복전쟁을 감행하다가 그가 죽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대제국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이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다. 지배이념이 한 개인에게만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10년 안팎의 짧은 기간 내에 그리스에서 인도 서쪽까지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가 사후에 부관들에 의해 다 갈라져 버린 알렉산더의 헬레니즘에 근거한 제국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한편 이슬람의 경우는 비록 모하메드가 사망한 다음에도 잠시 주변 부족들 사이에 동요가 있긴 했지만 네 명의 후계 칼리프들과, 칼리프들의 정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우마야드 왕조 지도자들에 의해 꿋꿋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종교를 통해서 피정복 지역민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승전 후 전리품 배분방식도 큰 역할을 했다. 즉 무슬림 군 지휘자들은 피정복지 일반인들에 대한 약탈은 엄금하고 왕조의 재산만을 약탈 분배하도록 허용했다. 약탈재산의 4/5는 병사들의 몫이 됐고 나머지 1/5은 메디나로 전달하는 방식을 엄격하게 실천했다.
여기서 두번째 포인트인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대해 민중 차원에서의 저항이 강하지 않았던 것은 이집트의 사례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서기 640년 전후에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이집트(당시는 비잔틴이 페르샤로부터 이집트를 탈환한지 10년도 안 된 시점이다)의 콥트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계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잔틴 지배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탄압과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암르 이븐 알라스(Amr ibn al-As) 장군이 이끄는 아랍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이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이슬람 원칙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든 유태교인이든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민족들(People of the Book)이므로 절대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므로 이집트의 콥트기독교인들은 “새로 들어오는 정복자들이 지금의 비잔틴 놈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지금보다 더 나쁠 수야 없겠지”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정복이 비잔틴 지배층의 붕괴 직후에 나머지는 저절로 굴러들어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네 번째 포인트인 약탈을 통해 개인 병사들이 축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싸울 인센티브가 있었다는 얘기에 대해 어떤 독자는 “어떻게 전쟁에서 야만적인 약탈을 허용할 수 있을까?”라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인 7세기 때의 얘기로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약탈(물론 이보다 더 끔찍한 만행까지 포함해서)은 전세계를 통틀어 어느 전쟁에서든 당연한 승자의 권리쯤으로 여겨졌었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살상을 최소화하고 이런 원칙을 위배할 경우 도덕적 지탄을 받게 된 것은 2차대전이 끝나고 유엔의 국제헌장이 채택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무슬림들이 약탈을 하는데 있어 일정한 원칙을 갖고 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당시 시대를 상당히 앞서 갔던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