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⑦21c 모하메드는 청바지차림?···”이웃을 섬기세요, 제발!”

일곱 번째 얘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나가기 전에 요즘 일부 국내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모하메드’의 올바른 한글표기에 대해 잠시 시비를 걸어보기로 하자. 일부 학자들은 ‘모하메드’가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고 아랍어 발음에 보다 충실하게 표기하면 ‘무함마드’ ‘무함맏’ 등이 더 가깝다며 이런 식으로 쓸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서 이들은 ‘코란’이 아니라 ‘꾸란’이 더 맞는 표기라고 강변하고 있다. (또 표기법과는 무관하지만 ‘알라’냐 ‘하나님’이 맞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한다.)

필자는 한글학자나 아랍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논란에 대해 권위 있는 해석을 내릴 입장이 못 되지만 아랍과 이슬람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외래어의 한글 표기는 아무리 정교한 표기원칙을 내놓는다 해도 그간 관용적으로 사용돼 온 표현방식을 뒤엎지는 못한다. 모하메드든 무함맏이든 어느 것도 아랍어 발음에 가깝게 옮겨 적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괜히 그런 데 신경 써서 애꿎은 독자들 헛갈리게 하는 대신에 그럴 논쟁을 벌일 여유가 있다면 좀더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 모하메드의 생애가 오늘날 전세계 1/4 인구에 해당하는 15억 인구가 믿는 이슬람 종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슬람 종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잘 아는 얘기지만 하나님(알라)과 모하메드의 관계는 하나님(여호와)과 예수님의 관계와 똑같이 대비시켜 말할 수는 없다. (또 한번 시비를 거는 얘기 같은데 왜 예수님이나 부처님에는 ‘님’을 붙이고 모하메드는 모하메드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가?)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원리가 있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빌렸을 뿐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모하메드는 모하메드이지 더 이상의 복잡한 논리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하메드는 그 이전에 세상에 왔던 아브라함, 모세, 다윗 같은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후세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훌륭한 ‘인간’의 모범으로 떠받들여지고 있지만 그를 신격화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그의 생전에 했던 발언과 행적을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모아 집대성한 ‘하디쓰’는 코란과 함께 무슬림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성전(聖典)으로 간주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일부 교육을 받지 못한 기복 민간신앙에 가까운 이슬람 신도들 중에는 모하메드나 다른 역대 이슬람 성인들을 모시는 사당(zawiya)을 세우고 여기서 돈 잘 벌고 자식들 잘 되라고 기도를 드리곤 한다. 이슬람 역사를 통틀어 종교정화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사당들은 파괴의 대상이 되었고 19세기 초 압둘 와하브가 이끌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운동’ 추종자들도 메카의 모하메드 사당까지 우상숭배라며 때려부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7세기식 복장에 수염을 휘날리는 탈레반 전사들 <자료사진=http://www.pentagonpost.com>

그렇다면 오늘날 이슬람 신도들이 모하메드의 가르침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가 7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턱수염을 휘날리게 기르고 펄럭이는 집바를 입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건가? 실제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원칙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다름 아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이었다. 이들은 턱수염을 기르고 펑퍼짐한 샬와르 카미즈를 걸치고 다니며 “모하메드 시절에는 음악을 듣지 않았고 TV도 보지 않았다”며 동네방네 다니며 라디오와 TV를 압수하고 주민들을 구타했다. 아랍혁명이 휩쓸고 간 튀니지나 이집트에서도 살라피스트들이 득세하여 탈레반식 행실이 독실한 무슬림이 따라야 할 모범인양 착각하고 날치고 있다.

탈레반식 복장을 따르는 것이 이슬람을 가장 잘 따르는 것이라 착각하는 이집트 살라피스트들

그러나 만약 모하메드가 7세기가 아니라 오늘날 21세기에 나타났다면 그는 어쩌면 전통복장 대신에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낙타나 당나귀 대신 혼다 시빅 하이브리드 카를 몰고 다녔을 것이다. 과거에 모하메드 선지자가 했던 행적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신을 따라 현재 변화된 환경에 맞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겉에 무슨 옷을 입든, 수염이 있던 없던,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하든, 그런 것들은 종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가 생전에 부르짖던,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고 같은 종교를 믿기만 하면 다 형제나 다름없고 네 이웃 섬기기를 하나님 섬기는 것처럼 하라는 기본적 가르침에만 충실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크게 잘못될 일이 없다고 하겠다.

이 주장에 대해 누구는 “네가 종교에 대해 뭘 그렇게 많이 안다고 잘난 척이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내 주장이 아니라 역사상 수많은 성현들과 대사상가들이 했던 말이다. 예를 들어 논어(論語)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묻기를 “스승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까요?” 여기에 대해 공자 가라사대 “흠, 그건 서(恕) 아닐까?” 예수도 비슷한 얘기를 한 바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해라.”

역대 유태교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랍비의 한 사람인 힐렐은 예수가 탄생하기 수십 년 전에 이런 얘기를 남겼다. 하루는 비유태교인이 랍비 힐렐에게 다가와서 당신이 한 다리를 든 채 유태교 경전인 토라의 심오한 원리에 대해 다 설명해줄 수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유태교로 개종하겠노라고 도박을 걸었다. 힐렐은 이에 대해 “네가 싫어하는 건 네 이웃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이게 토라 내용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주해에 지나지 않는다. 자, 이제 물러가 공부 좀 해라”하고 대꾸했다고 한다. 물론 이 자가 약속대로 유태교로 개종했는지는 토라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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