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농부 박영옥칼럼]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경제민주화의 ‘밑거름’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제18대 대선의 주요 쟁점이었고 박근혜 당선인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필자는 지난 25년 동안 주식투자를 해왔다. 1000여개에 가까운 기업을 탐방하고 공부하면서 느낀 우리나라의 경제민주화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변화)이다.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는 1인 경영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경제민주화는 요원하다. 말 많던 재벌계열의 빵집운영도 따지고 보면 가족경영의 산물이다.
기업지배구조란 기업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 이해당사자들의 역학관계를 총칭하는 말이다. 기업 이해당사자라고 하면 대주주와 경영진, 소액주주와 채권자, 종업원 등이 포함된다. 조금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기업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 권한을 소액주주에게까지 확대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우수한 기업지배구조가 기업 경쟁력의 원천으로 떠오르고 각국 경제의 장기적 안정성장의 기본요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99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기업지배구조의 기본원칙을 마련했다. 이 원칙의 핵심은 경영의 투명성과 주주에 대한 공정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주의 권한을 강조하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모델이 우수한 기업지배구조의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대주주, 혹은 대주주와 경영진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형태를 띠고 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에는 신규순환출자금지, 소액주주 등 비지배주주들의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 구축,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집중투표제, 전자투표제의 단계적 도입, 다중 대표소송제 단계적 도입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신규순환출자 문제는 박 당선인이 금지를 천명했고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도 강화하기로 한 만큼 논의에서 제외한다.
먼저 독립적인 사외이사의 선임이 중요하다. 사외이사제도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집단 총수의 독단적 경영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총수일가가 직간접적으로 사외이사 선임에 관여하면서 사외이사들이 오히려 총수의 독단경영을 보좌하는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돼 왔다. 현행 상법에서는 사외이사가 되려면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총수가 직간접적으로 뽑아놓은 기존의 사외이사들이 과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독립적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한 소액주주에게 후보 추천 권한을 주거나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에 소액주주의 몫으로 할당된 후보를 추천하는 게 바람직하다.
두번째는 집중투표제의 강화이다. 집중투표제도(cumulative voting)는 이사를 선임할 때 선임하고자 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1주식의 주주에게 부여하는 제도다. 이는 ‘1주 1의결권’의 원칙에 대한 예외이며, 소수파 주주도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임하여 이사회에 진출시킬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2명 이상의 이사 선임을 목적으로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주주는 1주마다 선임예정 이사와 같은 수의 의결권을 가지며(의결권=보유주식 수×이사후보수) 이 의결권을 후보자 한 사람 또는 몇 명에게 집중적으로 행사하여 득표 수에 따라 차례로 이사를 선임하게 된다.
통상적인 제도와 비교하면, 상법상 이사의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의 결의는 이사 한 사람에 대해 한번씩 이루어지므로 통상적인 방법(단순투표제)대로라면 몇 명의 이사를 선임하든 과반수의 결의를 지배할 수 있는 대주주가 이사 전원을 자신이 추천하는 후보로 선임할 수 있다(the winner-take-all tendency). 따라서 대주주는 자신의 의도대로 이사진을 구성하기 유리하고 소액주주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집중투표제는 이같이 이사 전원이 대주주에 의해 독점 선임되는 것을 견제하는 방법이다. 집중투표제 하에서는 아무리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라 하더라도 총 의결권의 수가 모든 후보들의 과반수를 넘길 만큼 충분하지 않다면 소액주주들의 의도가 관철될 가능성이 생긴다.
예컨대 발행주식이 100주이고 그 중 A주주가 26주, B주주가 76주를 가지고 있는 회사에서 집중투표의 방법으로 이사 3인을 선임하다고 하자. 이 경우 A의 의결권은 78개가 되고, B의 의결권은 228개가 된다. 그러므로 B가 이사 3인을 전부 자기 사람 b1, b2, b3로 선임하려면 의결권을 b1, b2, b3 각 1인에 대해 78개씩 분산해서 행사하여야 한다. 그러나 A는 a만을 이사로 선임할 의사로 자기의 의결권 78개를 전부 a에게 집중행사하면 a가 이사로 선임되고, 나머지 2인만이 B의 사람으로 선임될 수 있다.
집중투표제는 1998년에 도입되었지만 강제규정이 아니어서 100대 기업 중 지금 실시하고 있는 기업은 단 4곳뿐이다. 강제규정을 둬서라도 소액주주들의 참여와 권한을 높여 지배주주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세번째는 전자투표제도의 활성화이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주총회 현장에 참석하지 않고서도 인터넷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편리한 제도로 2009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도입한 기업은 거의 없다. 현재 전체 상장기업 2000여개 중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기업은 45곳에 불과하다. 그것도 선박투자회사 등 페이퍼컴퍼니 41곳을 제외하면 전자투표제를 도입한 일반회사는 외국계기업 1곳을 포함해 단 4곳이다. 이처럼 기업들이 전자투표제 도입을 꺼리는 이유는 다수의 소액주주가 주총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기업들이 그림자투표(Shadow Voting) 등 대리투표를 통해 편리하게 주총을 개최할 수 있다는 점도 전자투표제 도입을 미루게 만드는 원인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발표한 ‘2010년 상장회사 주주총회백서’에 따르면 주주들의 주총 참석률이 10% 이하인 회사가 58%에 이른다. 왜 주총이 제 역할을 못하는 걸까. 주주가 주총현장에 직접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해야 하는 현행 주총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의 주총은 수도권(서울 48%, 경기도 28%)에서 주로 열리고, 개최일도 특정일(3월 둘째 주, 셋째 주 금요일)에 집중돼 있다. 그 결과 여러 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거나 회사 일로 바쁜 주주들, 지방 소재 주주들은 주총에 가고 싶어도 참석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금융 선진국들은 일찍이 2000년대 초부터 주주가 현장에 가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해 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2000년 제도를 도입한 미국에서는 상장회사 중 45%가 전자투표제도를 채택하고 있고 영국과 일본에서도 활용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상장사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제 활성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안다. 일단 공공기관 주총부터 전자투표제를 적용한 뒤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인 모양인데, 비록 검토안이겠지만 하루 빨리 적용하여 전 상장사로 확대되길 기대한다. 어차피 2015년부터 섀도우보팅 제도가 폐지되는 개정안이 입법돼 있기 때문에 전자투표제가 활성화되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소액주주들의 의견이 반영돼 주총문화도 앞으로 보다 민주화, 선진화될 것이다. 한편 정부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상장 기업은 기업은행을 비롯해 조일알미늄,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윈스테크넷 등 6개 기업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중 대표소송제도이다. 다중 대표소송제란 종속회사의 부정행위로 손해를 입은 지배회사 주주가 종속회사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도입되지는 않았지만 2003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판례로 처음 인정됐다. 당시 법원은 모기업의 주주가 회사 돈을 횡령한 계열사의 전 대표이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판결을 내려 ‘다중 대표소송제’를 인정했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2005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증권 집단소송제와 공정거래법상 손해배상제도 활성화와 함께 소액주주의 권리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년전 우리나라가 세계은행이 조사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2년 연속 8위를 차지했다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조사대상 185개국 중 8위이기 때문에 최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10년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 순위는 조사대상 11개 국가 중 8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참고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7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싱가포르는 기업지배구조 순위에서도 아시아 1위를 지키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2위였던 홍콩 역시 기업지배구조 순위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우수한 기업지배구조가 함께 갈 수 있다는 확실한 지표들인 것이다.
우리가 기업지배구조 순위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 모두에서 최상위권으로 도약하려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지금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선진 자본경제라 할 수 있고 경제민주화도 이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 경제민주화의 밑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