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두얼굴 1] 탈레반의 모순이 투영된 바미안 석불

반대편 높은 산에서 촬영한 바미안 석불과 주변 마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을 두 차례(1996년~2001년, 2021년~현재)에 걸쳐 통치해 왔다. 탈레반의 아프간 집권 1기는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으로 얼룩졌다. 2021년 집권 2기를 맞이한 탈레반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향한 서구의 시선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탈레반이 말하는 그들 스스로와 서구가 말하는 탈레반, 어느 것이 탈레반의 진짜 얼굴인가. 2023년 12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을 몸과 마음으로 부딪힌 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전문기자가 있는 그대로의 탈레반과 아프간을 전한다. -편집자

신라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하고 쓴 왕오천축국전에 따르면 아프간 바미안시의 고대 불교유적 바미안 석불은 서쪽에 있는 56m 높이의 석불과 동쪽에 있는 38m 높이의 석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6세기 쿠샨 왕조 때 세워진 이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돼 있다.

바미안주와 바미안시에 들어오려면 누구든 뒷편의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주민들은 거주증명서, 택시 등 사업차량은 허가증을 제출해야 하고, 외국인은 여권과 비자 이외에도 필수 문답지까지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아프간 여타 지역의 검문소보다는 과정이 수월했는데, 바미안 석불을 보러오는 관광객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바미안 석불은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있으나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이르기까지의 길이 만만치 않다. 산을 넘고 넘어 바미안 석불 부근에 이르자 그제서야 평야와 주변을 흐르는 강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실크로드를 누비던 대상들은 바미안 협곡을 중심으로 조성된 마을에서 충분한 물과 식량,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들 상인들이 바미안 곳곳에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 석상을 모시면서 불교가 이 곳에 자리잡게 됐다는 설이 있다. 그로 인해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실크로드를 따라온 수많은 수도승들이 바미안에서 굴을 파고 구도에 정진했다.

파노라마로 담은 바미안 석불. 파노라마로 촬영했음에도 대석불과 소석불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다. 석불 앞의 포장도로에선 어디선가 공사가 이뤄지는지 커다란 트럭들이 먼지를 날리며 주변을 오고 갔다.

필자는 3일에 걸쳐 답사하고 또 촬영했지만 바미안 석불은 육안은 물론 사진이나 카메라로도 감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바미안 석불의 대석불에서부터 소석불까지의 거리는 약 1km 정도로 알려져 있다. 여러 사료들를 찾아보니 그 사이에는 100여개의 동굴이 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동굴과 스투파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스투파를 직접 들어가 봤다. 그 내부에는 종교적 색채가 담긴 벽화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세월과 종교를 초월한 아름다움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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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미안 석불엔 이란의 고대 조로아스터교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동굴들도 있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교의 형성과 전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는데, 고대 불교의 가장 큰 석불암에도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슬람이 국교인 아프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유적 중 하나인 바미안 석불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 문화는 바미안시를 비롯한 아프간 전역에 퍼져 있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의 출생지는 네팔의 룸비니이며,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인도 동북부와 네팔 사이의 고대왕국 마가다를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헝가리계 영국의 고고학자로 아프간의 수도인 카불에서 생을 마감한 아우렐 스타인(1862~1943)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랜 세월에 걸쳐 중앙아시아 곳곳의 불교유적을 답사한 그는 불교의 기원이 현재의 이란 동남부와 아프간 서남부 일대에 이르는 시스탄(자불리스탄)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바미안 석불의 존재와 바미안시를 중심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점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인도에서 고대 불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이 주제는 불교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나, 아우렐 스타인 일파의 주장은 여러 가설 중 하나다.

바미안 석불 앞에 넓게 펼쳐진 경작지대(왼쪽)와 대석불 앞 공터. 인근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공터 한 켠에서 축구를 즐기는 풍경이 이곳의 일상이다.

실크로드 불교의 중심지였던 바미안 석굴의 현대사는 굴곡이 컸다. 1960~70년대 바미안 석굴은 서방의 히피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은 석굴에서 생활하며 공간의 내외부를 훼손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소비에트가 아프간을 침공하면서 소비에트 군인들이 바미안 석굴의 일부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며 바미안 석굴의 운명은 비극으로 향해 갔다. 탈레반의 창시자였던 물라 오마르는 서구의 행태를 이중적이라 여겼다. 서구권에서 아프간을 돕는다면서 고통받는 국민이나 난민이 아닌 지역의 랜드마크와 같았던 바미안 석불을 복구하고 지원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아프간은 이슬람의 두 분파 중 수니파를 따르는 파슈툰 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시아파를 따르는 하자라족은 비주류로 바미안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오마르는 서구의 손길이 닿아 있는 바미안 석불암의 존재가 아프간의 민족적 동질성을 헤친다고 생각했다. 다수파인 파수튠족 출신의 탈레반은 1998년 탱크와 대포 등 군사무기를 동원해 바미안 석굴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2001년에는 다이너마이트로 바미안 석굴을 부수는 모습을 전세계에 생중계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존하는 바미안 석굴엔 온갖 흉터가 남아있다.

복원 공사 중인 대석불 앞에서 필자

아이러니하게도 2021년 8월 권력을 되찾은 탈레반은 아프간의 몇 안되는 관광자원 중 하나인 바미안 석불로 돈을 벌고 있다. 탈레반은 서구의 이중성에 질려 바미안 석굴을 부쉈으나 정작 그들이 필요하니 이용하는 모순을 드러낸 셈이다.

탈레반은 아프간을 약 20년만에 재장악하며 이전과 같은 공포정치는 없을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서구는 여전히 탈레반이 아프간의 자유와 여성인권, 문화 등을 억압한다고 바라보고 있다. 탈레반이 말하는 그들 스스로와 서구가 말하는 탈레반,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일까? 탈레반이 바미안 석불에서 보였듯, 아프간을 통치하면서도 그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아닐까? 탈레반의 이중성이 투영돼 있는 바미안 석불을 이번 연재의 첫 글로 삼은 이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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