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두얼굴 12] 가장 위험한 도시의 사람들이 만류하던 가장 위험한 국경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을 두 차례(1996년~2001년, 2021년~현재)에 걸쳐 통치해 왔다. 탈레반의 아프간 집권 1기는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으로 얼룩졌다. 2021년 집권 2기를 맞이한 탈레반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향한 서구의 시선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탈레반이 말하는 그들 스스로와 서구가 말하는 탈레반, 어느 것이 탈레반의 진짜 얼굴인가. 2023년 12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을 몸과 마음으로 부딪힌 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전문기자가 있는 그대로의 탈레반과 아프간을 전한다. -편집자

나시르 아이자즈 ‘아시아엔’ 파키스탄 지부장(왼쪽)과 필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자 인구 2천만의 대도시 카라치에 거주 중인 나시르 아이자즈는 ‘신드쿠리에’ 편집장으로도 활동 중인 저명 저널리스트다. 그는 “육로로 차만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며 필자를 만류했다.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을 넘기에 앞서 비자 취득과 정보 수집을 겸해 세계에서 가장 험악한 도시 중 하나인 파키스탄 남부의 카라치에 들렀다. 카라치에 거주 중인 나시르 아이자즈 ‘아시아엔’ 파키스탄 지부장과 현지 언론에 종사하는 그의 지인들은 필자를 따뜻하게 환대해줬다. 그런데 그들에게 양국의 국경지대인 차만을 통해 아프간으로 넘어가려는 계획을 밝히자 그들은 필자를 극구 말렸다.

파키스탄 카라치의 수산시장에서 만난 기업가 가문 출신의 에티샴(왼쪽)과 그의 변호사. 가장 위험한 도시에 살고 있는 그들이기에 개인총기를 소지한 채 경호원을 대동해 움직인다고 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재활중인 에티샴은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잘 연마된 호신용 장도가 들어있었다.

카라치에서 만났던 또다른 그룹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그룹엔 부동산 기업인과 변호사, 고위직 공무원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그 위험한 곳을 뭐 하러 가냐.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필자를 설득했다. 필자는 두 그룹에게 “왜 위험하고 피해야 하는지 나를 납득시켜 달라”고 해봤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만큼 국경지대의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의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경을 넘어가지 말라고 설득할 일이 이 말고 또 있을까?

퀘타에서 예약한 호텔이 전날 총격전으로 투숙이 불가능해 ‘세레나’ 호텔로 급히 거처를 옮겼다. 그날 밤 혹시라도 불상사가 벌어질까 두려워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던 필자도 파키스탄 퀘타-아프간 칸다하라 구간의 악명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물론 현지에 와서 현지인에게 들으니 그 위험성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발루치스탄의 주도 퀘타는 이란, 아프간의 국경과 맞닿아 있는데 특히 퀘타에서 아프간으로 넘어가는 길은 공권력의 손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다. 얼마 되지 않은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마저 꺼릴 정도다. 실제로 이 지역에선 약탈과 방화는 일상이며, 달리는 차를 강제로 세운 후 강도나 살인 등의 범죄가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달리는 기차를 향해 총을 쏘거나 폭탄테러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고 한다. 파키스탄 탈레반(TPP)과 발루치스탄 해방군, 지역 군벌들, 이름 모를 산적 등의 무장집단들이 20~30년에 걸쳐 이곳을 어지럽혀 왔다.

필자는 이전 글을 통해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국경이 난민들의 시위와 이를 진압하는 군인들로 아수라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이 최소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과 달리 무장집단의 범죄행위는 무법지대에서 이뤄진다. 그 무법천지를 통과해야만 국경에 다다를 수 있다. 필자가 육로로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넘어가려 할 때 아프간, 파키스탄, 이란의 모든 지인들이 극구 말렸던 이유다. 그럼에도 필자는 내 뜻대로 강행했다. 지금도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때로는 모험도 감행해야 하는 기자이자 여행자로서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넘지 못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퀘타에서의 이튿날 아침,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구매해 들고 다니던 컵이 깨졌다. 필자는 긴장할때 마다 양치질을 하는 버릇이 있다.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컵이 깨지면서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퀘타에서의 첫 날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예약한 숙소에서 전날 총격전이 벌어져 체크인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인근의 최고급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 돈으로 1박에 30만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했지만 컨시어지나 시설은 그 값어치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보안은 철저해 이중 철문과 엑스레이 검문을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파키스탄 발로치스탄 주의 도로는 미군 주둔당시 보급로로 쓰였기에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의 그 어느 도로보다도 깨끗하게 포장돼 있었다. 사막은 늘 아름답다.

다음 날, 호텔 측에 국경지대로 가는 차량을 수배해 달라고 하니 경로가 워낙 위험해 보증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택시를 수배해 길을 떠났다. 사막 중간 중간에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공장들이 보이길래 택시기사에게 물으니 벽돌공장이라고 했다. 화로에서 벽돌을 구우며 나오는 연기가 하늘을 새까맣게 가렸다. 이 지역에 석유나 석탄 등이 매장돼 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돈이 되는 자원은 온데간데 없고 심각한 대기오염만 유발하는 벽돌만 제조되고 있었다.

차만 국경에 이르는 사막의 마을들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혼돈(카오스) 그 자체였다. 파키스탄 영토임에도 아프간 국기와 아프간의 주류인 파슈툰족의 정당 깃발, 그리고 세기말을 암시하는 듯한 수니파의 검은색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남의 나라에서 겨우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그들만의 ‘해방구’가 아닌가 싶었다. 필자는 혼돈의 무법지대를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이런 행운이 두번 다시 반복되진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이 살기에 척박해 인구밀도가 유독 낮은 지역이었지만 몇몇 마을들도 보였다. 각 마을마다 특색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가옥이 나무로 지어져 굉장히 초라한 마을은 아프간인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그 중 아프간의 주류인 파슈툰 족이 사는 마을에선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파슈툰 족은 옛날 영국의 침략 당시 영국군과 맞서 싸워 물리쳐냈던 이들이다. 이러한 역사가 대대로 내려오면서 파슈툰 족의 마을엔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혼이 남아있는 듯했다.

택시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차만 국경 부근에 이르렀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우범지대에서의 돌발사태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돌릴 틈도 없이 혼돈의 국경을 마주하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워낙 인파가 몰려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국경선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차만 국경으로 향하는 관문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2023년 11월 1일 파키스탄 정부의 추방명령에 따라 파키스탄에서 쫓겨난 아프간 출신의 불법체류자들이었다. 약 40년간 전란에 휩싸였던 아프간 사람들이 파키스탄으로 피신해 왔는데 그 숫자가 약 350만~4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 중 50만명의 불법체류자들이 파키스탄을 떠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정치적인 문제로 파키스탄에서 체류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게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죽으러 가라’는 말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시르 아이자즈 ‘아시아엔’ 파키스탄 지부장은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아프간 출신 불법체류자들은 아프간 정부가 발행한 신원증명서가 없거나 과거 범죄 행위에 연루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부적격자들이 파키스탄 당국의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해 쫓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 W씨는 그 내막을 좀더 자세히 들려줬다. 그에 따르면 아프간의 부족 중 하나인 하자라족이 불법체류자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하자라족은 외형이 동아시아계와 유사해 아프간 내에서도 심한 차별에 시달렸고 그들 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신분조차 없이 파키스탄으로 쫓겨나듯이 넘어왔다는 것이다.

차만 국경지대. 이곳은 필자가 다녀본 50여 난민캠프 중에서도 가장 환경이 열악했다. 차에서 내려 촬영할 수 없어, 이곳의 풍경들은 전부 택시 조수석에서 촬영됐다.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지대는 아시아에서 유독 무더운 곳으로도 손꼽힌다. 여름철에는 섭씨 40도를 훌쩍 넘어가는데 사막지대이기도 한 이곳은 모래에서 달궈진 뜨거운 열기가 더위를 증폭시킨다. 모래뿐만 아니라 조약돌과 돌산들도 군데군데 있어 태양열이 복사되는데 그 열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사막이라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간혹 흐르는 실개천을 보긴 했지만 인근의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인지 알 길이 없어 도무지 마실 수가 없었다.

필자는 발칸반도와 그리스 거의 모든 섬의 난민캠프를 다녀왔다. 이외에도 세계 각지의 여러 난민캠프들을 가봤다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더 열악한 곳은 없었다. 먼지와 모래, 바람, 사람이 뒤섞여 난리통인데 제대로 된 텐트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유엔난민기구의 텐트조차 없었다. 이곳의 난민들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얻기 힘든 사막에서 타프천 아래 겨우 햇빛만 피한 채 노숙하며 하루 하루를 버텨가고 있었다.

아프간 난민들은 파키스탄 정부의 추방령에 맞서 매일같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파키스탄 군 병력은 그들을 막느라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이 악에 바쳐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에 맞서있는 파키스탄 군대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었다. 택시기사도 두려웠는지 친구 한 명을 뒷좌석에 태우더니 필자에게 “절대 창문을 열거나 내리지 말라. 그 누구도 촬영하지 말라.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던 곳을 지나야만 했다. 지구상을 돌아다니며 처음 목격한 광경이었다.

생지옥을 빠져나와 국경선에 이르자 경계를 둘러싼 철망과 쓰레기 더미, 빈 수레를 끌고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양국의 출입국사무소를 오가며 수레로 짐을 옮겨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 출국심사를 끝내고 짐을 받으러 가자 그 소년이 “돈을 받지 못했다”고 우겼다. 참 난감했었다. ‘오죽 먹고 살기 어려우니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되레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차만 국경을 향해 달려가는 차량들. 사람과 흙먼지, 차량과 공장의 매연이 뒤섞인 이곳은 필자가 다녀본 어느 난민캠프보다 위생이 불결했다.

파키스탄 출국 심사를 무사히 마친 필자는 중년의 남성에게 짐을 맡기며 아프간 입국 절차를 밟았다. 마침내 아프간에 발을 디딘 것이다. 훗날 알게 됐지만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을 걸어서 넘어가려면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양국의 출입국사무소와 세관 직원들에게 미리 연락해 협조를 구해야 함은 물론 양쪽에서 짐을 옮겨줄 사람들도 섭외해 돌발변수를 줄여야 한다. 또한 양국의 국경에서 대기해줄 차량까지 섭외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만 수일이 걸린다. 현지인들조차 사전에 빈틈없이 계획을 세워도 부족한 것을 필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홀로 처리했다.

무법지대에서 활개치는 무장집단, 국경선을 둘러싼 성난 군중, 출입국 절차상의 돌발변수까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번 아프간 취재 중 가장 험난했던 관문은 이곳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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