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두얼굴 13] 왜곡된 시선 너머의 두 얼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을 두 차례(1996년~2001년, 2021년~현재)에 걸쳐 통치해 왔다. 탈레반의 아프간 집권 1기는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으로 얼룩졌다. 2021년 집권 2기를 맞이한 탈레반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향한 서구의 시선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탈레반이 말하는 그들 스스로와 서구가 말하는 탈레반, 어느 것이 탈레반의 진짜 얼굴인가. 2023년 12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을 몸과 마음으로 부딪힌 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전문기자가 있는 그대로의 탈레반과 아프간을 전한다. -편집자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은 외국인의 입국뿐만 아니라 자국내 이동에 대해서도 통제했다. 비자를 받아 입국하더라도 도시에 체류하거나 도시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허가를 별도로 받아야 했다. 이러한 절차를 관장하는 곳이 문화정보부다. ‘문화’와 ‘정보’라는 전혀 다른 분야를 겸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보부’ 업무를 주로 다뤘다. 필자는 칸다하르와 카불의 문화정보부를 다녀왔는데 그 중 수도 카불에서의 심사는 더욱 까다로웠다.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넘어와 칸다하르와 카불의 곳곳을 다니면서 필자의 여정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주요 목적지인 바미안으로 이동하기 위한 허가를 받으러 카불의 문화정보부를 찾아갔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찾아간 정보부 관할 사무실은 그날 따라 분위기가 유독 거칠었다. 담당 사무직원과 그들을 감시하는 탈레반은 필자의 휴대폰을 샅샅이 검사하며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겪어왔던 과정이라 견딜 만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작고하신 필자의 부친과 조부의 신상까지 물어보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시작했다. 말이 심사지 취조나 다름없었다. 의미 없는 문답이 오가며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그들은 끝내 이동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끼니는 챙기려고 인근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식사를 청하는데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그 중 이란계 미국인 쉐르빈은 페르시아어는 물론 아프간 현지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마침 쉐르빈도 바미안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해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아침, 쉐르빈과 정보를 공유하다 뜻밖의 팁을 얻었다. 굳이 정보부 사무실에서 허가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문화부 관할 사무실을 방문해 별 다른 어려움 없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내 바미안으로 향했다.
필자와 함께 다녔던 쉐르빈에 대해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다국적 투자회사의 임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우리나라에 친숙했다. 외모가 아프간 사람과 흡사했는데, 현지인처럼 입고 다녀 탈레반의 검문을 곧잘 통과했다. 그에 따르면 인접국 이란은 아프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이란인들에게는 타국적 사람들보다 대우해 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필자는 쉐르빈 덕에 바미안에서의 일정을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바미안에서 돌아온 직후 잠시 생각해 봤다. 은인을 만난 덕에 지난 며칠 간 별 탈 없이 다녔는데 홀로 길을 나선다면 지난 시간 겪었던 고생을 또다시 버텨낼 수 있을까?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탈레반의 검문을 셀 수 없이 겪었고, 그때마다 나를 향해 겨눠진 탈레반의 총구들은 스트레스를 넘어서 트라우마가 될 정도였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국경지대에선 인류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범죄의 위협과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탈레반이 언제 어떤 꼬투리를 잡아 나를 끌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프간에서의 여정을 여기서 끝마치기로.
결정을 내린 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바미안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경유지인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를 예약해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게이트에서도 탈레반의 강도 높은 심사에 응하면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꾹 참았다. 국제선 비행기에 오르자 신물 나도록 봐왔던 탈레반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바퀴를 내딛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을 짓눌렀던 올가미로부터 해방됐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 분쟁지역을 다녀왔고,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크고 작은 곤경에 처했었다. 흔히 말하는 위험한 국가일수록 타지인을 스파이로 간주해 구금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분쟁지역을 취재할 때는 사람과의 접촉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여긴다. NGO, 난민, 심지어 거리의 행인들까지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 일지라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첩보당국에 보고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일당 독재 치하의 아프간 곳곳에선 탈레반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아프간에선 길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그 아이들도 필자를 탈레반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대가로 부당한 금품을 요구했었다.
필자가 위의 혐의로 타국에서 붙잡힐 경우 심한 말로 징역형이나 살다 나오면 끝이지만 -실제로 구금 당했다가 풀려난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작금의 아프간은 그 정도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달러 한 장이 아쉬운 아프간이 필자를 인질로 내세워 협상 테이블을 차린다고 생각해보자. 필자 한 명을 돌려받기 위해 국고가 투입되고 국력이 낭비된다면 그 미안함과 수치심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아프간에 있는 동안 행동 하나 하나에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번 취재 동안 많은 사진을 남기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길에서 탈레반이나 주변의 시설을 촬영하다가 불필요한 의심을 사기 싫었다. 수많은 검문소를 지나칠 때 마다 휴대폰을 제출해야 했기에 관공서나 군부대 등 보안과 관련된 사진을 남길 수도 없었다. 그나마 몇몇 사진들을 건졌지만 수많은 사진들을 온전히 남기기는 불가능했다.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지키려고 하는 원칙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해당 국가에 대한 지나친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는 것이다. 굳게 닫혀 있는 아프간의 경우 사전에 정보를 파악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특정 논조로 쓰여진 글들은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뿐더러 사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내 호흡으로 직접 취재한 것들을 기사로 쓰기 위해 가는 것이지 누군가 했던 주장을 되풀이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원칙은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집단 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를 취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강자의 편에 선다면 방탄장비를 갖추고 방탄차량에 탑승해 안전한 지역을 다니며 안전을 보장받고 취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분쟁을 겪고 있는 대다수 지역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약자였다.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면 그 진실을 가리려는 이는 약자일까, 아니면 강자일까? 필자는 몇 해 전 ‘아시아엔’을 통해 “분쟁지역의 약자들이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을 알릴 수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 큰 보람을 얻는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분쟁지역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서방의 언론을 통해 바라보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 왔다. 2021년 8월 탈레반이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이래 아프간은 서방 언론이 즐겨 찾는 자극적인 소재로 전락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아프간의 약자들 위에서 군림하는 탈레반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싶어 아프간으로 향했다.
모든 곳엔 양지와 음지가 있다. 어둠이 비추어 그늘 져 있을 수도 있지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늘 져 보일 수도 있다. 필자가 경험했던 모든 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탈레반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들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그들 나름의 규칙을 세워 국가 재건에 나서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곡된 시선으로 탈레반의 한쪽 얼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두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