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편지] 고구마와 고로쇠에 담긴 40년 우정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음력 설을 앞둔 1월 하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고구마 상자와 편지가 담겨 있었다.
“지난해 농사가 그런대로 잘 돼서 마음이 조금은 푸근합니다. 특히 고구마 농사는 꽤 잘 된 편이랍니다. 조금 보내드립니다. 농사짓다가 보면 늘 이런저런 사연을 짊어지고 엉뚱한 녀석들이 나타나 기대했던 농사꾼의 애를 태우기도 하지요. 그러면 애써 농사를 지은 농사꾼은 인석들을 이 그릇 저 그릇에 담아보지만 좀처럼 먹을 입을 쉽게 찾지 못하곤 합니다.
그런 중에 인서점아저씨의 아내는 이 못난 놈들을 쪄서 바가지에 담아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고구마를 먹으며 ‘참 맛있다. 어때요? 맛 있지요?’ 하곤 합니다. 이런 아내의 마음과 흙을 뒤집어 쓰고 사는 막내 재범이의 땀과 산골짜기의 땅울림 기운으로 담아 이 천덕꾸러기 녀석들을 선물이랍시고 보냅니다. 그래요, 그냥 맛있게 드세요!
산으로 간 인문학 농장 두렁농에서 머슴 인서점 아저씨 올림”
1980년대 이후 2010년대 중반까지 건국대 앞에서 인서점을 운영하다 접고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000로 귀농한 심범섭 선생의 마음이다.
필자는 작년 초여름 심 선생이 농사를 짓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 부용산 오두개마을 그의 농터를 찾았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이후 건국대 앞에서 인문사회학 중심의 ‘인서점’ 책방과 대학생·마을주민의 독서·생활공동체를 30년 이상 운영했다.
10년 전 쯤, 서점을 반 접고 자식들에게 맡겨놓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고 해서 ‘두물머리’라 불리는 양수리 북쪽에 있는 부용산 산골짜기로 귀농했다.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만 사람을 볼 수 있는 이 깊은 산골짜기로 아내와 막내아들 내외가 동행했다. 반세기 넘게 농사를 짓지 않아서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지 오래된 땅 수천평을 밭으로 일궈갔다. 심 선생은 이 산골짜기의 원주민인 노루며 꾀꼬리며 멧돼지며 키 큰 참나무며 해마다 감자밭을 덮치는 돌피 같은 온갖 풀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벗하며 살아야 하는, 말 그대로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작년 초여름 심 선생과 헤어진 뒤 반년쯤 지난 11월 11일, 아시아엔 창간 8돌을 맞은 날 이른 아침 그에게서 긴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시아N 여덟 돐을 축하드립니다. 입동이 지나자 산골짜기의 논과 밭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군요. 들을 채우고 비우는 것이 농삿꾼이라지만 가득 찼던 들녘을 빈들로 보자니 시간의 의미가 빈들을 채웁니다. 아시아N이 전해오는 이야기와 그 언어에서 우리의 귀와 머리를 넘어 마음과 생명을 깨워주는 느낌의 언어를 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빈마음을 따듯하게 채워주는 사람다움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앞을 살아간 이들이 비탈밭에 두 마리의 소를 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소와 함께 밭을 갈았습니다. 그러면 풀이며 나무며 새들이며 숲속의 노루와 온갖 생명들은 노래와 춤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아시아N 여덟돐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막 뛰어가서 뵙고 싶지만 마음을 주저 앉히고 세월의 그늘에 앉아서 손주가 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산으로 간 인문학 농장, 두렁농의 머슴아저씨 심범섭”
그날 밤 필자의 “감사합니다. 선생님 처음부터 큰 힘이 돼주셨지요. 건안하시길 기원합니다”라는 짧은 답문에 같은 날 밤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존경하는 친구님께 언어와 문화가 다른 많은 민족과 나라가 있는 아시아입니다. 아시아N의 창간이념이나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회장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늘 느끼지만 회장님은 언어보다 따듯한 사람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시는 걸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몸과 생명의 언어로 충만한 자연의 이야기와 소리로 그들 저의 스승인 참나무와 딱따구리와 벌레와 노루의 마음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보냈는데···.제 손주의 흥분한 말로 전하는 이야기는 제가 너무나 과분한 영광스러움으로 회장님과 아시아N 님들의 사랑을 받았군요. 허기야 소로 밭을 가는 농부의 노랫소리는 마음과 몸과 생명의 울림으로 완성된 소통의 극치라는 생각입니다. 회장님! 너무나 고맙습니다. 정작 보내고 싶었던 소로 밭을 가는 소리를 보냅니다. 시간 있을 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시아엔 창간 8돌 기념식과 봉준호 감독에게 ‘2019년 자랑스런 아시아인’ 시상식을 겸한 자리에서 필자는 그날 아침 심 선생이 보내준 메시지를 소개하며 인사말을 마친 터였다. 이것을 행사에 참석한 손자 편에 전해 들은 그가 답을 보낸 것이었다.
아래 링크는 심 선생이 보내준 소 울음소리다.
http://m.blog.naver.com/naree54/221681044848?rvid=213A1384AB4EE4B600E1D0D35E98EA296CC1
해가 바뀌어 올해 음력 설을 앞두고 심 선생께 새해 인사를 보냈다.
“존경하는 심범섭 선생님, 설 연휴는 애초 계획대로 잘 보내셨는지요? 올해 경자년엔 선생님의 뜻을 하나둘씩 꼭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양평에서 농사를 지으며 묵묵히 자연을 아끼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본이 돼주시니 무척 감사합니다. 작게는 가족부터 넓게는 공동체까지 실천 없이 이뤄지는 게 없는 법. 지난 40여년 제게 몸소 보여주신 것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상기 올림”
그리고 경칩을 하루 지난 6일 그에게서 문자메시지와 함께 그가 살고 있는 부용산 자락의 고로쇠 몇병이 아시아엔 사무실에 도착했다.
“개구리 두꺼비를 따라 농사꾼도 눈을 뜨는 때입니다. 그리고 새들이 약수를 찾아 봄맛을 즐기는 때랍니다. 엊그제부터 직박구리와 동고비가 고로쇠나무 숲에서 분주하더니 녀석들의 고로쇠물이 터져나오고 저도 녀석들을 따라가며 물을 받았습니다. 조금 보냈습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어수선하네요. 자연이 주시는 위로의 선물이 아닐까요.”
심범섭 선생은 몇 자 덧붙였다. “지난 봄에 회장님과 심박사가 두렁농에 오셨을 때 우리가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바로 그 자리였지요. 아주 오래된 큰 고로쇠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지워줬는데 그 고마운 나무에서 준 봄선물입니다. 심(형철) 박사님도 잘 계시겠지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8년 가을로 기억된다. 당시 그는 서울 강동구(당시는 강남구) 길동의 안흥공업전문학교 앞에서 동아서점이라는 조그만 책방을 하고 있었다.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할미꽃이 피는 4월 청명께는 코로나 질병도 수그러들지 않을까? 그때 양평 두렁농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