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렁농 인문학 농부의 ‘호미 일기’
[아시아엔=심범섬 산으로 간 인문학 농부] 망종이 지나고 하지를 바라본다. 망종은 봄의 고비를 넘고 여름의 풍요를 준비하는 우리 옛사람들의 지혜의 그릇이다.
흔히 보릿고개라고 하는 생존의 언덕배기에서 이제는 희망을 바라보고 준비하자는 이를 테면 파이팅 같은 것이 망종이다. 망종은 깔끄라기 종자를 일컫는 말이다. 배고픔의 끝자락에서 보리 베기와 벼의 모내기를 독려하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때 아닌 코로나바이러스의 고비를 겪고 있는 우리다. 다행이 이 고비를 넘기는 우리 모두의 지혜 역시 세계의 찬사가 쏟아지듯 지혜로웠다. 마침 밤꽃이 피고 있다.
이제 모내기를 할 때다. 나도 호미를 들고 나섰다. 씨앗주머니를 옆에 차고 밭두럭을 깔고 나가며 한 땀 한 땀 옥수수 씨앗을 넣는다. 여름방학에 손주 녀석들이 와서 쪄먹을 특식이다. 벌써 감자 고랑은 풀 투성이다. 허기야 풀이라고 살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풀도 새끼치고 번성해야 할 것이다.
숲에서는 새들이 한창이다. 알을 낳고 새끼를 부르며 좋아라 좋아라 노래를 한다. 호미소리가 사르르 사륵 사르르사륵 허공으로 떠올라 숲으로 가고 달그락 달그락 호밋날 끝과 만나는 자갈은 나에게 말을 건다. 조금 큰 놈은 호미 끝을 붙잡고 시비를 건다. 옆에 살고 있던 돌피란 놈도 덩달아 매달리며 힘을 쓴다.
“엇쭈 이놈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제 세상인 줄 착각한 게로구나. 얌마 이게 네 땅이냐?” 나는 화가 났다. “임마! 이 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엄연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법으로 떡하니 도장을 찍어서 정한 인간의 땅이구 바로 내 땅이란 말이야. 임마 허긴 이놈들아 이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이긴 하다. 그래 내가 지긴 졌다. 니들이 먼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키가 큰 돌피는 고랑 이쪽 저쪽을 막아 서서 수문장 노릇을 하고 가운데는 바랭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쇠비름은 아예 감자포기를 밀어낼 기세다.
나는 호미를 다잡고 밭고랑을 차고 나간다. 호미는 농사꾼의 손이다. 그러나 이제 호미는 시골농가에서조차 구석배기로 밀려나 조용히 쉬고 있는 옛 물건이다. 그런 임종을 앞둔 호미가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내 손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사람으로 일깨워 주는 연필이 되어 주었다.
나는 날마다 호미연필로 공부를 한다. ‘가갸거겨 고교구규···’ 밭고랑에 앉아서 글자를 쓴다. 하얀 빈 밭에 또박또박 글을 쓴다. ‘그려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되어야지 되어야지’ 줄을 맞춰서 글을 쓴다. 어느새 넓디 넓은 공책은 글줄로 가득 찼다. 꽉 찼다. 장하다.
이제 망종은 망종이고 입하는 풍년이다. 그래도 숲에서는 아직도 멀었다고 떠들며 나를 무시한다. 네가 인간을 알고 땅을 알고 하늘을 알고 생명을 알려면 아직도 저 남은 밭을 다 채워 읽고 써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또 밭에서 호미로 쓴다 읽는다. 하늘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