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점아저씨의 산골이야기] 산나물 계절에 맛보는 곤드레와 정선아리랑
[아시아엔=심범섭 산으로 간 인문학 농장 ‘두렁농’ 지킴이] 봄이 긴 겨울잠에 빠져 있던 자연을 깨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봄은 계절의 옷을 걸치고 급히 떠나는가 보다. 엊그제부터는 집 뒤 아카시아나무 숲에서 꾀꼬리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봄마다 느끼는 거지만 꾀꼬리가 숲의 정적을 깨고 자신의 출현을 알릴 때마다 나는 왠지 가슴이 메어온다. 세월이 어느 땐들 가지 않고 멈춰있을까마는 꾀꼬리나 뻐꾸기가 울 뒤 숲으로 찾아와서 알리는 봄소식은 봄의 절정을 통해 세월의 흐름이 한껏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선명한 포물선으로 한해를 맞았다가 보내는 나의 느낌을 동원해서 나에게 세월의 존재를 전해준다.
햇살이 밝게 떨어지는 숲 건너 저만치 철쭉꽃이 보인다. 계절은 벌써 봄을 반 넘어 보내고 지금 막 늦봄의 고개를 넘고 있는 중이다. 진달래꽃을 다 떨어뜨리고 서운했던지 숲은 서둘러 철쭉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봄이 좋지만 진달래와 철쭉의 붉은 꽃을 주고받으며 이 산자락에서 이어가는 늦봄의 뜨거운 정을 느끼는 이맘 때가 가장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맘 때는 산나물의 계절이다. 내가 봄과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그 무엇도 아닌 산나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봄 숲을 봄 숲으로 치장하는 철쭉이 붉은 꽃송이를 진달래에게서 이어받아 숲의 여기저기에 뿌리기 시작할 때는 들과 산은 또 봄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 쇠기 시작하는 들나물에서 산나물에게 넘겨주는 때다. 그러면 봄을 찾아 봄기운으로 들떠 있는 나물꾼들은 들에서 산 안으로 든다.
산의 품은 들의 품 맛과는 사뭇 다르다. 들이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아들의 거친 맛이라면 산은 엄마의 아기자기한 정이 발자욱마다 눈길마다 주르르 깔린 우리 마음의 안길이다.
나는 산길로만 가려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텃밭에 붙이려던 마음을 팽개치고 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따로 없다. 길섶을 벗어나면 산이다. 지팡이 삼아 꼬챙이 삼아 작달막한 삭달가지 하나를 골라 꺾어 들고 두어 발 내딛자 어아리순이 반긴다. 고사리를 제쳐놓고 먼저 손길이 간다는 어아리순을 뜯어 손 안에 쥐니 그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봄기운처럼 온 몸으로 전해온다. 어아리 바로 옆으로 실한 고사리 두대가 갈대 숲을 뚫고 올라와 보란 듯이 우쭐댄다.
잇대어 나간 갈대 섶을 서걱서걱 밟고 나가자 취나물이 반긴다. 아직은 애리애리 해서 뜯기가 민망한 삽주싹을 뒤로 하고 급한 비탈을 내려서자 도랑가 습한 땅엔 말고비가 우람하게 버텼는데 그 곁으로 참고비가 보숭한 손가락을 포기로 내어 밀고 나를 부른다.
들뜬 마음으로 왼손에 꺾어든 고사리를 얼른 바구니에 넣고 고비 아래쪽에 바짝 손을 넣고 위로 올리며 자근자근 휘어서 올라가자 고비는 뚝 꺾어지며 제 몸을 내 손에 내어 준다. ‘산나물의 귀인’ 고비를 한 주먹이나 꺾어들고 좋아서 쿵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이번엔 담상하게 자라는 곤드레 밭이 눈으로 들어온다. 곤드레는 산촌 사람들의 봄 한철을 이어주는 식량이라고 했다. 곤드레를 한 움큼 뜯어 들고 허리를 펼치니 저 멀리 아스라한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나물꾼들의 청량한 아라리 가락이 산탈을 타고 흐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님에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 나겠네
재작년 봄철이 또다시 돌아왔는지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가
또 올라오네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쇠지를 말아라
지난 봄에 만났던 님을
또 만나자꾸나”
민요가 다 그렇지만 정선아리랑은 언제 들어봐도 듣는 이 마음을 번거로운 세상에서 비몽사몽의 시공에 문득 띄워놓는다. 한치 뒷산은 백두대간 태백준령의 한 고원에 펼쳐진 육백 마지기 논의 뒷산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제 우리 인간은 자신의 고향이 몹시 그리운 때가 된 것 같다. 산이 그냥 좋고, 민요가 그냥 좋고, 산나물이 그냥 좋으니 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문명과 도시와 그 바닥의 경쟁에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 인간의 고향이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