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석의 난행難行⑧] 사라예보 난민수용소를 찾다

사라예보에서 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난민수용소는 군부대를 개조하여 다수의 난민을 수용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에 인접한 작은 수용소는 모두 폐쇄되고 난민들은 이곳에 수용될 예정이다. <사진 이신석 기자>

[아시아엔=이신석 <아시아엔> ‘분쟁지역’ 전문기자] 이번 ‘난행’을 기획하며 주요 목적지 중 하나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서부의 비하치 지역이었다. 그곳은 EU 회원국인 크로아티아와의 국경에 인접해 있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들이 모여 드는 곳이다. 특히 겨울의 혹독한 날씨에 숲에서 천막생활을 하는 난민들도 많다고 들었기에 그들의 행로를 따라 가보려는 계획이었다.

이신석 난민 세르비아

그래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 우선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로 향하기로 했다.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까지는 버스로 약 7시간 반이 소요된다고 했는데, 보스니아의 도로 사정이 최악이라 그보다 훨씬 더 걸릴 수 있기에 일명 ‘합승밴’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른 남자 승객 2명과 운전기사와 필자, 도합 4명이 오후 늦게 사라예보를 향해 출발했다.

세르비아인 운전기사 마르코와 필자. 필자(왼쪽)는 서있고 마르코는 앉아있는 사진이다. 그는 키가 2m에 이르는 거한이었다.

마르코라고 하는 운전기사와는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그는 전형적인 세르비아 ‘마초맨’ 스타일로 키가 2m나 되는 거구였다. 그와 나는 옛 유고연방이 여러 나라로 나누어지고 수많은 전쟁과 분쟁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던 이유를 대략 세가지로 압축했다.

첫째, 발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1961년)인 이보 안드리치의 작품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나온 역사처럼 오스만제국이 침략하여 아이들을 데려가 ‘예니체리’로 키워졌고 그들이 은퇴 후 다시 이 땅에 돌아와 지주계급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권력과 부가 세습되어 계층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둘째,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들에 의한 수탈로 결국 1차대전의 시발이 되었다.

셋째, 크로아티아 극우세력 우스타샤에 의해 세르비아인과 그외 민족을 인종청소를 하였던 숨겨진 역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운전기사와 열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새 보스니아 국경에 다달았다. 외국인은 버스가 아닌 다른 차량을 이용해서 국경을 건너는 것은 불법이라 했다. 그래서 국경 100m 앞에서 내려 이민국까지 걸어가야 했다. 한밤중에 벌판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본 이민국 직원은 어이없어 했다. 세르비아 이민국을 통과하여 다리를 건너 보스니아 이민국을 통과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사라예보의 스키장에 폭설이 내려 아름다움을 더 했다. <사진 이신석 기자>

운전기사 마르코와 다음날 사라예보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연락도 하기 전에 사라예보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인연인가 보다 싶었다. 그는 사라예보 외곽에 난민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며 함께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교외로 이동했다.

산을 넘고 조그만 타운을 지나자 멀리 우측으로 교도소인지 군 병영인지 알 수 없는 건물과 탑이 보였다.

-마르코, 저기가 교도소야?
“바로 저기야, 토니. 저기가 난민 수용소야.”

이윽고 난민수용소로 들어가는 직선의 진입로에 다다르자 마르코는 차를 세우며 더 이상 못 간다 했다

-왜 더 안 가고 멈춰?
“토니, 여기서 더 들어가다 경찰에게 걸리면 난 문제가 생겨.”

혼자서 사진만 찍고 가자는 심정으로 입구 가까이로 걸어 가려는데 본능적으로 위험이 느껴졌다. 어디 있을지 모를 감시 카메라도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보스니아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어떤 상황에 몰릴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쉽지만 멀리서 사진을 찍고 몸을 돌려 차로 돌아왔다.

그날 밤 만난 오랜 친구이자 보스니아 사람인 아디는 그 얘기를 듣고 펄쩍 뛰었다. 자신의 집에 난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 부인의 스마트폰을 훔쳐 갔다고 했다. 옆 동네의 빈집에 난민들이 불법거주 하며 강도짓은 물론 살인을 저지른 용의자로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난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했던 보스니아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이 돌아서 난민에 대해 아주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난민수용소에 접근하는 외부인 특히 외신기자들은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거”라며 내 걱정을 해주었다.

아디는 1992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도시가 봉쇄되자 유엔에 의하여 구출되어 스웨덴으로 입양된 바 있다.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크루즈 승무원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고 난민에 대해 균형있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같은 말을 하니 앞으로 보스니아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각별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디의 부인 마리아가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기자를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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