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낭송을 듣고 싶습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김삼환 목사님!
가을이 깊어갑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가 떠오릅니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지난 여러 달, 은퇴를 앞두고 많은 기도와 사색을 하셨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목사님께서 응답받으신 대로 선한 결실 맺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난 번 글에서 썼듯이 저는 명성교회와 그다지 멀지 않은 길동교회(당시는 길리교회라고 했습니다)에 어머님 등에 업혀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외대에서 20년 이상 아랍어를 가르치다 2년 전 귀국한 요르단 국적의 모멘 교수는 라마단 기간에 단식도 안 하며 기도의식도 제대로 안 하는 “lazy Islam”이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새천년 초이튿날 미수(米壽) 연세에 돌아가신, 성경 읽으시는 사진 속 어머님를 컴퓨터 옆에 놓고 하루 두어 차례 기도하는 ‘게으르기 그지 없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래도 유년주일학교 이후 교회에 다니면서, 그리고 기자로서 사회생활 하면서 훌륭한 목회자들을 만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분은 인도네시아 선교에 평생을 바치신 서만수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은 1966년 전도사로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하던 장면입니다. 몸집이 몹시 크셨던 목사님은 서울 변두리 둔촌동 마을 곳곳을 저희들 손을 잡고 다니며 “꽃에 모여 붕붕 벌들 일하고/ 착한 아이 모여 말씀 배운다…”라는 어린이 찬송을 함께 부르며 재밌는 성경 인형극도 보여주시곤 했지요. 그분이 몇 년 뒤 인도네시아로 선교를 가셨다는 얘기가 들렸고 저는 잊고 있었지요.
30년 세월이 훨씬 지나 2006년 여름 인도네시아 방문길에 그분 소식을 들었지요. 당시 김호영 주 인도네시아 대사는 “교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서 목수님이신데, 자카르타는 물론 지방의 섬까지 구석구석 다니시며 헌신하신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지요. 그리고 2~3년쯤 뒤, 설레는 맘으로 전화를 드렸지요. 그런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군요. 소천하신 거였습니다. 이듬해 봄, 코린도 정무웅 당시 부회장님이 한국 방문길에 서만수 목사님 추모집을 가져다 주었지요. 구절 귀절 읽을 때마다 40년전 초등학교 시절의 서만수 전도사님의 모습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습니다.
다른 한분은 목포에서 산돌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교회를 담임하는 있는 김종수 목사님입니다. 1999년 서울 군자동에 성음교회라고, 100명이 채 안 되는 소규모 교회에 부임해 온 김종수 목사님 말씀 중 두 대목이 또렷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맡은 교회들은 늘 많아야 100명, 어떤 때는 50명도 채 안 됩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려 했고, 구유의 아기 예수를 떠올리며 보낸 목회생활, 후회하지 않습니다.”
“1982년 연세대대학원 신학과 졸업 때 문익환 목사님이 저와 친구를 부르시더군요. 그러면서 ‘종수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 하고, 자네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때는 참 섭섭했는데, 훗날 되돌아 보니 참 감사했습니다. 영혼을 구제한다는 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 줄 조금씩 느낍니다. 물론 많이 부족해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 지 두렵습니다만.”
두 분 외에도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으며 의지할 곳 없는 편에 서신 예수님을 늘 닮으려 하는 점이지요.
존경하는 목사님! 모두에 적은 ‘국화 옆에서’ 뒷 부분으로 제 글을 맺겠습니다. 언제 기회 되면 목사님의 이 시 낭송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과, 아드님 김하나 목사님 그리고 명성교회 신도 여러분께 하나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아시아엔 발행인 이상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