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국민당 ‘총통후보 전격 교체’, 승부수인가 자충수인가?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강을 건널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도중에 갈아타다가 자칫 물살에 휩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살이 더 거세지는 경우를 감안한다면 눈앞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좀 더 든든한 말로 바꿔 타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대만의 집권 국민당이 그런 처지다. 차기 총통선거가 내년 1월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것저것 따질 만큼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국민당이 17일 임시 전당대회에서 총통 후보를 훙슈주(洪秀柱)에서 주리룬(朱立倫) 주석으로 교체한 것은 당의 진퇴를 건 특단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선거를 불과 3개월 밖에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기존 후보를 전격 하차시켰다는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훙슈주가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줄곧 열세를 보임에 따라 나름대로 승부수를 감행한 것이다.
후보가 주리룬으로 교체됐다고 하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게 문제다. 국민당이 후보 문제로 내홍을 겪는 동안 차이잉원은 이미 저만큼 앞질러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훙슈주 카드를 고집했다가는 총통선거와 동시에 치러지는 입법원 선거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따라서 후보 교체는 입법원 의석이나마 지키려는 뜻에서 취해지는 고육지책이다.
벌써 국민당에서는 입법원 출마 지원자들의 탈당 러시가 본격화된 마당이다. 훙슈주 후보 체제에서 열세를 간파한 예비후보들의 자구책인 셈이다. 탈당 인사들은 더 나아가 ‘국민당 연맹’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신당 창당 움직임까지 드러내고 있다. 자칫 국민당이 와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지도부로서는 후보를 교체하는 외에 달리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훙슈주가 원래 차이잉원에 비해 정치적 지명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지난 7월 후보로 선출된 이후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여러 무리수를 저질러 왔다. 중국과의 양안관계에서 현실을 너무 앞지르는 통일정책이 대표적이다. 상대방인 차이잉원이 대만 독립을 추구한다는 속내를 감추고 ‘현상유지’를 내세우는데 대한 반격이기도 했지만 과거 대만의 어느 정치 지도자들보다 주장의 수위가 훨씬 높았다.
그는 후보자격이 취소되기 며칠 전까지도 적극적인 양안 통일정책을 강조했다. “대만헌법은 중국과의 궁극적인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는 식이다. 통일정책과 관련하여 중국과 정치적인 대화의 시작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국민당 지도부조차 이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을 정도다. 미묘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전에 지도부와의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불만의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이와 관련하여, 양안 정책에 대한 대만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사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중국과의 통일보다는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만이 이미 독립을 이룬 상태’라는 답변도 적지 않다. 대만역사를 대륙에서 시작된 중화민국의 역사와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 파동이 그것이다.
갈수록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것도 국민당으로서는 악재다.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이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경제의 예속화 현상만 두드러지고 있다. 양안 교류확대에 대한 경계심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야당후보인 차이잉원이 40~50%의 지지율을 꾸준히 보이고 있는데 비해 훙슈주의 지지도가 10%대에 그친 것이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당으로서는 선거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차이잉원은 민진당 후보 자격으로 일찌감치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 정치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돌아온 데 이어 최근에는 일본 방문까지 마쳤다. 마잉지우 총통 정부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발걸음이다. 미국이나 일본을 동원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미도 시사한다.
결국 국민당 후보가 주리룬으로 교체되면서 총통선거는 국민당과 민진당의 남녀 주석 간의 맞대결로 굳어지게 됐다. 당초 양당의 여자 후보끼리 맞붙게 됨으로써 누가 당선되든지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총통이 탄생할 것이라며 눈길을 끌었으나 여성 후보끼리의 맞대결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리룬은 자신이 시장을 맡고 있는 신베이(新北) 시민들에 대한 사과로 유세를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를 채우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훙슈주의 후보 자격을 철회하는 과정에서 매수공작이 없지 않았느냐는 세간의 의혹은 또 다른 걸림돌이다. 이미 야당측에서 이러한 혐의에 대해 고발함에 따라 검찰 특별수사부가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대만 정치권에서는 국민당 지도부와 훙슈주 사이에 후보 사퇴의 대가로 5억 대만달러(약 170억원)를 주고받기로 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국민당으로서는 이래저리 곤경에 처한 셈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국민당이 전체 113석인 입법원 선거에서 과연 몇 석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의석이 38석 이하로 떨어져 개헌 발의권까지 빼앗기는 최악의 경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중화민국’이라는 국호와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헌법적 논의가 시작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국민당 내에서는 이런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다.
그러나 전례없이 후보를 교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국민당으로서는 신뢰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다. 유권자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겠느냐가 관건이다. 애초부터 대표성을 인정받는 사람들이 후보로 나섰다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이다. 주리룬이나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 우둔이(吳敦義)? 부총통 등 후보로 거론되던 지도부 인사들의 책임회피에서 비롯된 사태다.
이번 후보 교체로 국민당이 전선을 가다듬고 있으나 정말로 승부수가 될지, 아니면 자충수로 끝날지는 선거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벌써부터 주리룬에 대해 ‘국민당의 구세주’로 평가하는 얘기들이 있는가 하면 이번 사태를 두고 ‘3류 연속극’보다 재미가 떨어진다는 촌평도 없지 않다. 선거는 내년 1월 16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