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대만 최대 국경절 쌍십절 의미 퇴색하는가?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대만 최대의 국경절인 쌍십절(雙十節, 10월 10일) 행사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는 조짐이다.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마련됐던 1911년의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경축일이지만 갈수록 복잡해지는 양안관계와 국제정세의 여건에서 본래의 취지를 잃어가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통일이냐, 독립이냐의 지향점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쌍십절의 역사적 의미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올해는 내년 1월로 다가온 차기 총통선거까지 맞물려 쌍십절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오히려 어수선한 분위기다. 선거전을 이끌어가고 있는 국민당 훙슈주(洪秀柱) 후보와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간의 신경전에 임기말을 앞둔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의 레임덕 현상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건국 104주년을 맞는 올해의 쌍십절 행사가 앞으로의 연례행사 추진에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될 정도다.
이번 쌍십절 행사에서 불꽃놀이가 취소되는 방향으로 결정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공식 불꽃놀이를 개최하도록 예정됐던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高雄) 시가 안전문제를 감안하여 행사를 전면 취소토록 건의했고, 결국 준비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지난 6월 신베이(新北) 시의 놀이공원에서 일어난 화재사고의 쓰라린 기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이 사고로 11명이 목숨을 잃고 5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니, 이에 대한 충격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쌍십절 행사 중에서도 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것이 불꽃놀이라는 점에서 불꽃놀이 취소 소식은 쌍십절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미리부터 반감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불꽃놀이에는 하늘을 밝고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처럼 대만의 미래를 기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가오슝시가 관내의 3~4곳을 대상으로 불꽃놀이 장소를 물색했으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마당에 별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가오슝시의 천추(陳菊) 시장이 야당 후보인 차이잉원의 선대본부장을 맡았으며, 부총통 러닝메이트로까지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꽃놀이 취소로 인해 미묘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양상이다. 대만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의 기본노선 때문이다. 국민당과 달리 대륙 시절 중화민국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고 있으며, 따라서 쑨원(孫文)을 국부로 인정하지도 않고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대만이 아닌 대륙의 역사로만 이해하려는 것이 민진당의 입장이다.
따라서 천추 시장이 안전문제를 내세워 불꽃놀이를 반납했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당과 민진당 사이의 ‘역사논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개편 문제를 놓고 학생들이 문교부 청사 점거를 시도하는 등 격렬히 반발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도 고려됐음직하다. 역사교과서 개편에 따른 마찰도 따지고 보면 중국 대륙의 전체 역사에서 과연 어느 시점부터를 대만 역사로 간주할 것이냐 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만의 국내 여건으로 인해 쌍십절 행사가 모두 취소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난터우(南投) 대지진이 일어난 1999년의 쌍십절 행사가 전면 취소됐던 것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무려 2060명의 사망자와 8700명의 부상자를 초래했던 만큼 경축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라콧 태풍이 몰아쳤던 2009년에도 정부 주최 쌍십절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고, 행사 비용은 전액 태풍피해 복구에 투입됐다.
지난해에도 쌍십절 불꽃놀이 행사가 타이중(台中)에서 열리긴 했으나 우여곡절이 따랐다. 가오슝에서 지하에 매설된 가스관의 연쇄폭발 사고가 일어난 데다 대만해협의 펑후(澎湖) 섬에서 국내선 여객기의 추락사고가 이어졌던 까닭이다. 연달아 일어난 이들 사고로 모두 7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조기(弔旗)를 게양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쌍십절 행사를 치르는 비용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대략 6000만~8000만 대만달러가 소요된다. 우리 돈으로 따져 적게는 22억원, 많게는 29억원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가운데 불꽃놀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1000만 대만달러 안팎에 이른다. 그만큼 비용을 아낀다는 취지도 감안한 조치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차이잉원 후보가 이미 3달 전부터 올해 쌍십절 행사에 직접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다. 여야를 떠나 정치 지도자로서 정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차이 후보가 지난 6년 동안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다는 점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뒷전에서 팔짱 끼고 있다가 내년 선거에서 승리가 유력해지니까 이제 와서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만하다.
이에 대해 국민당의 훙슈주 후보가 “그동안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한 해명 한마디 없이 미리부터 기념식 참석을 예고한 이유가 뭐냐”라며 날선 공격을 퍼붓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껏 쌍십절 행사를 일부러 외면한 것은 신해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만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였음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공격이다.
그러나 훙슈주 자신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시절이던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쌍십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면서 양측 공방이 어지럽게 펼쳐지고 있다. 입법위원 신분이었는데도 기념식 참석을 거부했던 것은 정치적인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밖에 달리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훙슈주는 2006년 행사에는 참석했지만, 그때도 정부 행사에 동조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천수이볜의 퇴진을 촉구하는 ‘붉은 셔츠’를 입고 기념식장에 나타난 것이어서 이래저래 정치적인 논란만 가열되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경제 여건도 좋지 않은데다 뎅기열까지 번져가고 있어 쌍십절을 기념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이다. 당초 3%대로 전망했던 GDP 성장률이 1%대로 가라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돌고 있다. 뎅기열도 지난 5월 첫 발병한 이래 타이난(台南)을 중심으로 남부지역에서 계속 확대되는 추세다. 여기에 뒤쥐안 태풍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하지만 불꽃놀이는 취소됐을망정 쌍십절 기념행사는 예정대로 추진된다. 타이베이 총통부 청사 앞 광장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게양되고 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군대 행진과 사자춤, 드럼악대 등 민속공연 행렬이 뒤따르게 된다. 전국 대도시 거리에도 청천백일기가 자랑스럽게 나부끼게 될 것이다. 내년 선거의 결과에 따라 쌍십절 행사의 정치적 주최가 또 바뀌게 되는 것은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