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이야기] 시진핑과 마잉주 회동, 그 자체로도 큰 수확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의 이번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양안 관계에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만하다. 긴장과 대립으로 점철됐던 분단 66년의 역사를 통해 양측의 국가 지도자가 서로 마주 앉은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서로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썼을 망정 현직 정부 책임자들끼리 만나 기꺼이 악수를 교환했다.
물론 첫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서로의 메시지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눈 형제”라며 양안이 같은 중화민족(中華民族)임을 내세운 시 주석에 대해 마 총통은 “우리가 오늘 함께 한 배경에는 60년이 넘는 분단의 역사가 있다”는 언급으로 응수했다.
시 주석이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서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했다면 마 총통은 먼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두 정상은 넥타이 색깔에서부터 서로의 의중을 확실히 드러냈다. 시 주석은 붉은색 넥타이를 착용한 반면 마 총통은 푸른색 넥타이를 맸다. 회담 테이블에는 국기가 걸리지 않았으나 저마다 오성홍기(五星紅旗)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목에 감고 등장한 셈이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어도 국공내전 끝에 갈라져야 했던 양안 분단 당시의 국가적 존재감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 차이는 그동안의 양안 갈등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사소할 뿐이다. 대만해협에 수시로 몰아쳤던 군사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언급으로 과거의 앙금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서로 간에 형성된 신뢰와 화해의 분위기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에 패해 대만으로 물러났다는 사실도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약속하는 1992년의 ‘공동인식’이다. 궁극적으로 양안 통일을 지향하는 중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대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는 ‘하나의 중국’을 대표할 수 있도록 해석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대외적인 명분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두 정상의 역사적인 회동도 결국 이 원칙을 다시 확인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주석은 이 원칙을 들어 대만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 측에 엄중히 경고할 필요가 있었고, 마 총통 또한 양안 협력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이를 위해 대만을 현실적인 별개의 존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번 회담의 함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이 내년 1월로 다가온 대만 총통선거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영향이 전혀 없지야 않겠으나 선거가 70일도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 판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40% 이상의 지지율로 이미 판세를 굳혀가는 분위기다. 국민당은 최근 주리룬(朱立倫) 주석을 내세워 기존 훙슈주(洪秀柱) 후보를 교체했으나 뚜렷한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경계하고 있는 것은 차이 후보가 양안 관계의 정책으로 내세운 ‘현상유지’ 공약이다. 용어상으로는 똑같지만 현 마잉주 총통이 추진해 온 ‘현상유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無統), 독립을 추구하지 않고(無獨),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無武) 마 총통의 ‘3무정책’에 비해 차이 후보는 기존 국민당 지지세력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잠정적인 제스처로 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민진당이 줄곧 대만의 독립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도 차이 후보가 총통에 당선될 경우 양안정책의 변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민진당은 총통 선거와 동시에 치러지는 입법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할 경우 ‘중화민국’이라는 국호(國號)부터 바꿔야 한다고 벼르는 분위기다.
대륙에서 시작된 역사적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대만공화국’으로 새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민진당은 ‘92공식’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중국 측은 이번 정상회동을 통해 민진당의 독립 움직임에 미리 쐐기를 박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총통선거의 큰 흐름을 막기는 늦었을지라도 독립 움직임만큼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최근 민진당이 미국과 일본에 급속히 접근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중국 당국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차이잉원은 총통후보 자격으로 이미 양국을 방문해 전례없는 환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양측의 회동은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국의 메시지 외에는 별다른 여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대만으로서는 국제기구 활동 확대가 가장 중요한 현안이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시 주석이 대만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과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의 참여 방안을 마련해 보겠다고만 약속했을 뿐이다.
회담 장소가 싱가포르로 정해진 것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양새는 아니다. 중국과 싱가포르 수교 25주년을 맞아 시 주석이 국빈방문 중에 마 총통을 현지로 초청해 회담을 가졌기 때문이다. 회담이 끝나고 각각 별도의 기자회견을 하면서 중국 측이 장즈쥔(張志軍) 대만사무판공실 장관을 내세운 것도 의도적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하다. 대만 측 기자회견에서는 마 총통이 직접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으로 중국의 대외정책에 있어 대만의 우선순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최소한 그동안 금기시되던 양안 최고 지도자 사이의 회동이 이뤄질 수 있는 발판은 마련됐다.
민진당의 차이 후보도 자신이 당선될 경우 베이징을 방문해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만큼 누가 다음 총통에 당선되든지 간에 내년에도 양안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일단 그러한 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회담의 수확으로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