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위안부 문제···대만, 한국과 어떻게 다른가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대만에서도 제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다시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지난 연말 긴급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위안부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지은 것이 국민당 정부와 사회단체들에도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는 5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은 퇴임 전까지 이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데다 민진당으로의 정권교체가 굳어지는 분위기에서 중국과의 교류문제는 진전이 거의 중단된 상태이며 경제활성화 정책도 단기 처방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만이라도 해결을 보겠다는 뜻이다.
마잉지우 총통은 2016년 새해를 맞아 발표한 신년사를 통해 “일본 정부로부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일 간에 위안부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에도 총통부는 대변인 발표를 통해 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일본 정부에 촉구한 바 있다.
한일 간에 협상이 타결된 상황에서 대만 정부는 최소한 그만한 수준의 해결책은 돼야 한다며 일본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함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국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듯이 대만 피해자들에게도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임은 물론이다.
대만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측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온 지도 이미 20여년에 이른다. 마잉지우 총통이 법무장관으로 재직할 때부터 불거졌던 문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들을 법률적으로 지원하는 타이베이 여성구호재단의 도움으로 도쿄지방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으나 2005년 패소로 끝난 상태다.
대만 정부와 여성구호재단은 국민모금 방식으로 타이베이에 ‘위안부역사전시관’ 건립 계획을 추진 중이다.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알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활동에 참여를 이끌겠다는 취지다. 원래는 종전 70주년이던 지난해에 맞춰 전시관을 세우려고 했으나 부지 선정 문제로 새해로 계획이 늦춰졌다.
제2차 대전 기간 중 위안부로 끌려간 대만 여성들은 모두 2000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공식 요구하고 나선 피해자들은 58명에 불과하다. 피해자들이 과거의 상처가 다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현재 4명만 생존해 있다. 생존자들의 평균 나이는 91세다. 몇 해 전에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다룬 <갈대의 노래>(蘆葦之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국 피해자들과 연대를 강화해 왔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대만 피해자인 루만메이(盧滿妹), 천핀(陳品) 할머니가 2003년 서울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가진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 뒤에도 피해자 대표들이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함께 참가하거나 아시아연대회의를 결성해 공동전선을 펴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관련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대만을 비롯해 중국, 동남아 등 피해국들과 보조를 맞춘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 타이베이 여성구호재단이 한국에서의 위안부 문제 제기에 발맞춰 설립됐다는 사실 자체가 우연이 아니다. 서울에서 1992년 1월8일 첫 수요집회가 시작된 바로 그해에 설립됐다.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의료지원과 간호활동, 심리치료 등의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여성구호재단의 캉슈화(康淑華) 사무국장은 이번 한일 정부의 협상 타결에 대해 “이번 사례가 대만과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피해자들에게도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의 경우 일본과 정식 외교관계가 이뤄져 있지 않으므로 정부 당국 간 협상이 이뤄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서로 대표부가 교환 설치되어 있으므로 협상 진행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대만이 도쿄에 파견한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와 일본이 대만에 파견하고 있는 재단법인 일본교류협회가 그 협상 창구다. 이미 양국 정부는 1992년 공동기구를 설립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방침을 마련했지만 지금껏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편, 대만 내에서는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 문제가 이미 완전히 끝난 만큼 이 문제로 양국 간의 미래 관계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다. 대만에서 태어난 본성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통 자리에 올랐던 그는 친일성향의 옹호자로 분류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리덩후이 전 총통은 대만의 일본 식민지 시절 교토제국대학 농학부에 다니다 자원입대해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한 바 있다. 퇴임 후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역사의 부침에서 야기된 대만의 정체성 혼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