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대만 국민이 요즘 ‘국적 찾기 투쟁’에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정부 당국이 발급한 공식 여권에 별도의 비닐 커버를 씌우는 것은 불법인가. 여권이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고 씌우는 것이어서 커버가 용인된다면, 거기에 또 다른 문구를 집어넣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요즘 대만 국민들 사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논란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닐 커버보다는 커버에 적인 문구가 논란의 초점이다. 국민들 가운데 일부가 여권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고 표기된 국적 부분을 가리고 ‘대만국(台灣國)’이라는 스티커로 대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Republic of China’라는 영문 표기에 있어서도 ‘China’ 대신 ‘Taiwan’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문제의 ‘대만국’ 스티커가 지난 7월 민간단체에 의해 시중에 처음 선보인 이래 25만개 이상이나 배포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만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여권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국적(國籍)찾기 투쟁’이다.
이 스티커와 짝을 이루는 게 “Taiwan is my Country”라는 스티커다. ‘대만국’ 스티커가 여권의 앞표지용이라면 “Taiwan is my Country” 스티커는 뒷표지용이다. 한자로 ‘台灣是我的國家’라는 문구가 함께 따라붙고 있다.
이들 스티커의 의미는 분명하다. 중국 대륙에서 출범한 중화민국은 지금의 대만과 엄연히 다르다는 주장이다. 대만의 역사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대륙 시절의 역사와는 구분해야 하므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정체성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만의 독립론과도 맞닿아 있다. 중국 정부가 주장하듯이 양안은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국가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거리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대만독립(台灣獨立)’이라는 스티커가 이러한 인식을 말해준다. 적어도 현재 중국에 귀속된 홍콩이나 마카오와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 대부분 대만 국민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한 폐해도 발생하고 있다. 개인이 자기들 마음대로 여권에 허락되지 않은 스티커를 붙임으로써 여권의 신뢰성이 저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존엄성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보니 외국에서는 가짜 여권이 아닌가 의심을 받기도 한다.
최근 싱가포르에 입국하려던 대만 여행객 3명이 창이공항에 도착하고도 입국을 거절당한 것이 바로 여권에 붙여진 스티커 때문이었다. 여권의 진짜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입국을 거절당하자 싱가포르 주재 대만대표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렇게 문제가 되자 당사자들이 문제의 스티커를 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싱가포르 이민국 당국은 끝내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대만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권법 시행세칙을 개정해 여권의 원래 디자인에 어떠한 변형도 금지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개인들이 마음대로 여권을 변형시키는 것은 물론 속 페이지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스탬프를 찍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표현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스티커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여권의 원래 모습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각국에 여권 샘플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규정은 새해부터 정식 발효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조치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자유의사를 억압하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에 퇴행하는 처사”라는 불만이 제기된다. 즉, “이 스티커가 여권 소지자의 국적이 중국이 아니라 대만임을 쉽게 알아보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면 굳이 막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추종하여 대만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는 정치적인 지적도 제기된다.
사실, 이런 불만이 제기될 만큼 국제사회에서 대만 국민들이 푸대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일에서는 대만 국적자를 ‘465’라는 코드로 별도 분류하다가 2011년 중국 국적자(chinesisch)와 함께 ‘479’ 코드로 통합시켰다. 이에 대한 대만 정부의 공식 항의로 대만국적 코드가 다시 살아났으나 요즘도 간혹 마찰을 빚고 있다. 제네바의 유엔기관에서 대만 여권 소지자에 대해서는 시설 관람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도 최근의 사례다.
대만이 정부 차원에서 여권에 ‘대만’이라고 표기했던 경우도 없지는 않다.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당시이던 2002년 여권 앞표지의 ‘중화민국’이라는 표기 윗부분에 ‘대만’이라는 표기를 추가했던 것이다. 당시 민진당이 대만의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던 조치다.
여권 표기는 아니지만 중국인과 구분하려는 목적에서 스티커가 배포된 적도 있다. 지난해 베트남에서 대규모 반(反)중국 시위가 일어났을 때 현지에 주재하는 대만 기업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배포된 스티커가 그것이다. “I am Taiwanese. I am from Taiwan”이라는 내용으로 적힌 스티커가 영어와 베트남어로 배포되었다.
여권에 붙여진 스티커로 인해 문제가 야기되는 현상은 지도적인 정치인들이 저마다 대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도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현 마잉지우(馬英九) 총통도 4년 전의 선거운동에서 “나는 대만인인 동시에 중화민국 국민(I’m a Taiwanese and also an ROCer)”이라는 표어를 내걸기도 했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대만’이라는 표현이 억제되고 있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대만의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대만과 비자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는 모두 158개 국가에 이른다. 최근 에티오피아와 모리타니아, 레바논, 잠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과의 협정이 추가된 결과다. 운전면허 상호 사용 국가도 한국과 일본, 미국을 포함해 85개국에 이르고 있다. 대만 면허 소지자가 별도의 시험을 보지 않고도 현지 면허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면허증의 국적 표기도 ‘중화민국’만 허용된다.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