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선거철만 되면 원주민 언어로 인사하는 정치인들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정치인들이 원주민 언어인 ‘호클로’에 관심을 보인다면 선거철이 다가왔다는 증거다.”
대만에서 유행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비아냥이다.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호클로’ 인사말을 배워 연설할 때마다 한마디씩 아는 체를 한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의 호감을 사려는 의도임은 물론이다.
사투리로 취급되는 하카(客家)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바로 그러한 시기를 맞고 있다. 내년 1월 차기 총통 선거와 입법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야당인 민진당보다는 여당인 국민당에서 더 뚜렷하다. 대만의 독립을 추구함으로써 평소 원주민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온 민진당에 비해 국민당은 국가적 정체성의 뿌리를 대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 했기 때문에 선거철을 앞두고 그에 대해 만회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가 국공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온 이래 장제스(蔣介石), 장징궈(蔣經國) 총통 치하의 계엄령 당시에는 호클로와 하카어가 방송이나 학교에서 금기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선거철 모습은 딴판이 되었다. 국민당 총통 후보 훙슈주(洪秀柱)의 경우 지난 7월 전당대회에서 연설 도중 부분적으로 호클로를 사용했고, 국민당 부주석 하우룽빈(?龍斌)도 입법원 선거에서 지룽(基陸) 지역구 후보로 선출된 이후 사무실의 전화 인사말을 호클로로 녹음해 놓았다. 과거 마잉지우(馬英九) 총통도 선거 유세에서 원주민 거주지를 방문할 때는 호클로 인사말을 사용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만에서 민주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지만 정치인들이 득표를 노려 선거철에만 원주민들에게 관심을 돌린다는 점에서 오히려 원주민 사회의 눈총을 사기도 한다. 진정성이 없는 유권자 기만행위라는 이유다.
훙슈주 후보만 해도 2009년 입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호클로 숙련도 인정시험 실시를 위해 편성된 4000만 대만달러(약 15억원)의 교육부 예산을 삭감하려 했던 처신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원주민들은 호클로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여러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원주민 부락 명칭을 원래의 자기들 이름으로 환원시켜 달라는 것이 그 하나다. 지금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붙여준 광푸(光復), 푸싱(復興), 렌아이(仁愛), 신이(信義) 등의 이름이 자기들과는 전혀 관련도 없이 정부 중심의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1987년 계엄령 철폐 이후 지금껏 30년간에 걸친 원주민들의 끈질긴 청원으로 부락 명칭이 바뀐 사례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가오슝(高雄)의 ‘나마시야’와 자이(嘉義) 현의 ‘알리샨’ 등 2개 부락에 불과하다. 그 전에는 다른 부락과 마찬가지로 ‘삼민(三民)’, ‘우펑(吳鳳)’ 등 정부 지정 이름으로 불리던 부락이다. 현재 대만에는 타이베이 근교의 우라이(烏來)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55개의 원주민 부락이 공식 지정되어 있다. 대만의 행정구역 체계상 향(鄕)으로 불리는 단위가 바로 그것이다. 현(縣)과 시(市)에 편입된 경우는 구(區)로 소속되어 있다.
대만 원주민은 모두 30만명 안팎에 이른다. 전체 2300만 인구의 1.3%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16세기 말 포르투갈 선원들이 대만을 처음 발견하고 ‘포모사’라는 이름을 붙였을 당시 거주하던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아름다운 섬’의 원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일정 거주지를 지정받아 보호받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원래는 평지족(平地族) 원주민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인에 동화됨으로써 현재 고산족(高山族)만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동안 모두 14개 종족이 법률적으로 보호받고 있었으나 지난해 카나카나위(?那?那富), 흘라알루아(拉阿魯?) 등 2개의 고산족이 추가로 인정받아 모두 16개 종족으로 늘어났다. 이들 원주민 종족이라고 해야 구성원이 기껏 500~600명씩에 지나지 않는다. 카나카나위족의 경우 고유언어도 있지만 종족 내에서도 전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도 안 된다.
원주민들은 지방제도법 규정에 따라 부락의 재정 자치권과 대표 선출권을 행사하고 있다. 원주민 부락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지난 2010년 타이베이와 가오슝, 타이중 등의 광역시 관할로 합병되면서 자치권을 잃었으나 계속된 청원과 반발로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자치권을 되찾은 상태다. 그러나 관할 광역시로부터 여전히 간섭이 남아 있어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예산을 할당받는 일반 부락에 비해서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치는 어느 정도 실현됐다고 해도 학교에서의 교육 내용이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살리기보다 친(親)대륙 성향의 동화정책 바탕 위에 이뤄지는 것도 원주민들의 불만 사항이다. 이들이 “우리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런 때문이다. 자신들이 원래 거주하던 토지를 잃었으며, 토착언어인 호클로가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데 대해서도 그렇게 흔쾌할 리는 없다. ‘원주민 기본법’에 따라 행정자치뿐만 아니라 교육자치를 통해 원주민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희망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철을 맞아 정치인들이 악수를 건네며 자기들의 언어인 호클로로 인사말을 던지고 있으니,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물론, 안 쓰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원주민들의 권익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다가 마치 철새처럼 불쑥 찾아와 한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