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이야기]차이잉원의 워싱턴 ‘면접시험’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내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후보의 방미 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시카고, 워싱턴, 뉴욕, 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 열이틀 간에 걸친 6개 도시 방문을 마치고 6월9일 타이베이로 귀환한 것이다. 야당 주석으로서 국민당 후보를 꺾고 정권교체에 성공할 경우의 국가경영 비전을 제시하고 미국 정치권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번에 가장 주목받은 점은 차이 후보가 자신의 양얀관계 정책을 미국 조야에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새로 꺼내 든 ‘현상유지(status quo)’라는 카드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민진당이 대만의 통일을 지향함으로써 중국 지도부와 번번이 마찰을 빚어 온 상황에서 제시된 대안이 바로 현상유지 정책이다. 민진당의 기본노선을 우회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타협하는 측면이 강하다.

방미 기간중 국제전략력문제연구소(CSIS) 연설을 통해 드러난 차이 후보의 양안정책은 ‘국민들의 의사’와 ‘헌법 질서’에 따르겠다는 취지로 요약된다. 현상유지 정책에 대한 보충설명인 셈이다. 현재 국민당 정부 체제 아래서 양안관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나 ‘92년 컨센서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의 ‘불통(不統)·불독(不獨)·불무(不武)’ 등 3불정책과도 차별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차이 후보는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한다. 이번 워싱턴 방문에 맞춘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서도 “양안의 신뢰와 번영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중국 지도부와 투명한 대화 채널을 확보해 나가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선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누그러진 것이다. 그가 2011년 총통후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직설적인 입장이었다. “대만은 이미 독립을 이룬 국가다. 국민들은 국제사회에서의 차별대우를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중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대만의 운명은 2300만 대만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로 정해야 한다는 ‘타이완 컨센스’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 후보의 유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계심은 여전하다. 중국의 주미대사인 추이톈카이(崔天凱)가 그의 방미를 두고 “얼버무리지 말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는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고 포문을 연 것이다. 민진당이 양안정책에 있어 일단 현상유지 노선을 제시했지만 일단 집권에 성공한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독립 움직임을 드러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추이 대사는 더 나아가 차이 후보의 방미가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라는 주변의 지적을 거론하며 이번 방미를 ‘취업 면접시험(job interview)’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굳이 외국과 대화하려느냐는 힐난이다. “미국보다는 13억 중국 국민들의 테스트를 먼저 거쳐야 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공격을 의식한 듯 차이 후보도 대만 교민들과의 만찬행사에서 “총통 자격을 다른 나라에 의해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 오직 대만 국민들에 의해서만 검증을 받는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자신의 워싱턴 방문 목적에 대해서도 “면접시험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대만 국민은 양안관계에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것이며, 그 책임을 떠맡을 용의가 갖춰져 있음을 전하러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이 후보는 미국 관계자들과의 접촉에서 양안정책 외에도 민진당이 집권할 경우의 국방, 경제, 무역정책 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가입문제나 중국이 인공섬 위에 군사시설을 강화하고 있는 남중국해의 영유권 문제도 논의했다.

민진당은 차이 후보의 이번 방문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국무부를 방문해 오바마 행정부의 관리들과 접촉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무된 듯한 분위기다. 물론 앤토니 블링켄 국무부 부장관과 면담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그가 4년 전 총통 후보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의 노골적 냉대와는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백악관의 에반 메데이로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과 상원 국방위원장인 매케인 의원과도 만났다.

무엇보다 대만 정치인 가운데 공식적으로 국무부 청사 안에 발을 들여놓은 경우는 이번 차이잉원이 처음이다. 그동안에는 미국 관리들이 대만 정치인을 만나더라도 국무부 건물이 아닌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면담이 이뤄지곤 했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태도가 이번 차이잉원의 방문을 계기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외교부 홍레이(洪磊) 대변인의 발표를 통해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기를 바란다”며 대만에 대해서도 ‘그릇된 신호’를 보내지 말도록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국측은 “과거와 바뀐 것이 없고 단순한 비공식 관계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당측도 앞으로 총통 후보가 결정되고 미국을 방문할 경우 차이잉원과 비슷한 예우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1978년 대만과 단교했으면서도 대만관계법(TRA)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만과의 공동방위조약이 자동 폐기됨에 따라 이를 대체하기 위해 이듬해 마련한 법이다. 대만이 외부로부터 침공받거나 군사적 위협이 가해질 경우에 대비해 무기를 판매하고, 대만해협의 유사시에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도 들어 있다. 국교가 끊어진 상황에서도 미국이 국내법으로 30년 이상이나 대만의 안보를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지극히 예외적이다.

그렇지만 이번 차이잉원의 방미 기간 중 있었던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차이 후보 일행이 시카고 방문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향하던 기내에서의 얘기다. 아메리칸에어라인을 탔는데, 기내 방송으로 차이 후보와 보도진들의 탑승 사실이 기내 방송으로 고지됨으로써 승객들의 박수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라 이름이 ‘대만(타이완)’이 아니라 ‘태국(타일랜드)’으로 소개됐다. 차이잉원이든 누구든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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