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이야기] 란유섬 ‘세븐일레븐 논란’ 왜?

원주민들의 전통사회에 도시생활을 상징하는 슈퍼마켓이 들어서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최근 대만 사회에서 열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제다. 슈퍼마켓이 자칫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급격히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초래된 논쟁이었다.

가히 ‘편의점의 천국’이라 할 만큼 거리와 골목마다 슈퍼마켓이 들어서 있는 대만에서 이런 논란이 벌어졌다는 자체가 흥미롭다. 실제로 슈퍼마켓이 전국적으로 9800개를 넘어섰을 만큼 곳곳에 편의점 간판이 걸려 있는 나라가 바로 대만이다.

대만 본섬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란유섬(蘭嶼)이 그 무대다. ‘난초 섬(Orchid Island)’이라 불릴 만큼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는 이 섬은 다우(達悟)족 원주민들의 자치 거주지로서 자기들만의 언어와 풍속,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구라야 전체 4000명 남짓에 불과한 정도다. 그 가운데 본섬에서 흘러들어온 1400여명의 한족 혈통을 제외하고 2600여명이 원주민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대만에서 가동중인 원자력발전소 6기의 중저준위 폐기물 임시 처분장이 설치된 곳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논란을 부추겼던 양상이다.

논란은 세븐일레븐 체인업체인 통일슈퍼(統一超商, Uni-President Chain Store)가 이곳에 점포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세븐일레븐은 원래 미국 텍사스 주에서 시작된 편의점 체인이지만 1991년 일본에 경영권이 넘겨진 이래 현재 세계적으로 맥도날드 점포보다 더 많은 점포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만에서만 해도 지난 7월 가오슝(高雄)에 5000번째 지점이 개설되었다.

이러한 발표에 대해 대만의 유명 배우인 유셩(宥勝)과 시인인 류커냥(劉克襄) 등을 비롯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슈퍼마켓이 들어설 경우 물질적인 생활방식의 도입으로 원주민들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금방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슈퍼마켓은 원전 폐기물 처분장 만큼이나 치명적인 폐해를 끼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우려다.

대만 슈퍼마켓의 편리성을 감안하면 이러한 우려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 어느 때나 식사 해결이 가능하고 관광기념품까지 다양하게 갖춘 곳이 대만의 슈퍼마켓이다. 극장표와 열차 승차권, 프로야구 관람권까지 판매하고 있으며, 심지어 세탁물까지 취급하고 있다. 교통범칙금이나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을 납부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대만 사람의 3분의 1이 매일 슈퍼마켓에 들른다는 조사도 나와 있다. 아침에는 식사를 하고 점심에는 차를 마시러 가는 식이다. 저녁 늦은 시간에도 간단한 주전부리를 찾는 사람들로 붐비곤 한다. 전통 생활방식이 도시형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 없이는 살아도 슈퍼마켓이 없으면 못 산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슈퍼마켓 브랜드로는 패밀리마트나 하이라이프, OK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세븐일레븐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란유섬 말고도 다른 섬들 대부분에도 슈퍼마켓이 들어서 있다. 세븐일레븐만 해도 본섬에서 멀리 떨리 떨어진 진먼다오(金門島)나 마쭈다오(馬祖島), 펑후(膨湖)섬에 대략 70개 정도가 문을 열고 있다. 대만의 전체 인구 약 2300만명 중에서 반경 5km 안에 편의점이 없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2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란유섬의 문화적 배경은 다른 섬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대만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16개의 원주민 자치족 가운데서도 필리핀 원주민과 비슷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형적으로도 섬 자체가 필리핀 바탄제도의 끝자락에 해당된다.

전해져 내려오는 주민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이 독특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보존가치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편의점이 들어설 경우 이러한 전통문화가 망가질 것이라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섬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입장은 다르다. “슈퍼마켓이 들어서더라도 전통적인 정체성이 그렇게 쉽게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세븐일레븐의 진입을 반기는 분위기다. 왜 자기들이 마치 특별한 희귀동물처럼 보호를 받아야 하고, 더군다나 현대적인 편리함의 혜택에서 제외돼야 한다고들 주장하느냐며 불편한 집단 심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원주민들의 불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외지(본섬) 사람들이 란유섬에 한두 번 와본 것만으로 우리보다 섬을 더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린다. 만약 란유섬에 슈퍼마켓이 들어서는 것이 마땅치 않게 생각된다면 자기들 동네의 슈퍼마켓부터 문을 닫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란유섬에 편의점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행정적으로 이 섬을 관할하는 본섬 타이둥(台東) 시의 농민협회에서 운영하는 편의점이 벌써 몇해 전부터 운영되던 터였다. 판매하는 물건이 도시의 슈퍼마켓처럼 다양하지 않고 농산물 정도에 그치고 있었을 뿐이다. 식품이나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는 기존의 다른 구멍가게 주인들도 경쟁관계를 떠나 슈퍼마켓의 등장에 찬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섬에 슈퍼마켓을 설치하는 게 영업면에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전체 고객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손해를 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편의점 체인업체인 통일슈퍼는 “란유섬에 점포를 낸다면 오히려 연간 1백만 US달러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기에 결정된 조치”라고 밝히고 있다.

슈퍼마켓 설치를 둘러싼 란유섬 주민들과 전통문화 훼손을 우려하는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전통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거부할 수 없지만, 그것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검토가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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