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이야기] 시안사변과 장쉐량이 재평가받는 이유
시안(西安)사변의 주인공 장쉐량(張學良)이 대만에서 오랜 세월 연금되어 있던 주택이 내부 개조작업을 거쳐 최근 일반에 공개되었다. 신쭈(新竹)현 산간지역인 우펑(五峰) 마을에 있는 일본식 주택이다. 1949년 국민당 정부가 인민해방군에 밀려 본토를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올 때도 그는 그대로 붙들려왔던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연금생활이 1990년에야 끝났으니, 본토에서부터 따진다면 무려 53년에 걸친 연금이었다.
중국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던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1936년의 시안사변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 세력을 토벌하도록 임명됐던 장쉐량이 오히려 자신의 명령권자인 장제스(蔣介石)에게 총구를 들이댐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계기를 마련했던 사건이다. 2년 간에 걸친 험난한 대장정 끝에 겨우 옌안(延安)에 도달하고도 국민당 군에 포위된 채 마지막 궁지에 몰려 있던 마오쩌둥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사태를 전환점으로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둥의 홍군이 내전을 중단한 채 함께 항일전선에 나서게 되지만, 정작 장쉐량 본인은 장제스에 대한 명령불복종에 강제 연금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붙여지게 된다. 지휘권 박탈과 함께 10년의 금고형을 받게 된 것이 그 결과다. 물론 나흘 뒤에 곧바로 사면령이 내려졌으나 엄격한 가택연금에 놓이게 되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기간이 반세기가 넘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가 연금됐던 우펑 마을이 일반인 지역과는 외떨어진 아타얄(泰雅) 원주민 부락이었다는 점에서도 그에 대한 감시가 철저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외부인과의 접촉도 좀처럼 쉽지가 않았을 터다.
이번에 함께 공개된 그의 유품에서도 쳇바퀴 돌 듯했던 연금생활의 단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사진과 신문 스크랩, 편지, 집필하던 원고 등을 모두 포함해도 기껏 20점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시안사변의 책임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데 대한 사면장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대만으로 쫓겨오는 황급한 순간에도 사면장 만큼은 간직하고 있었을 만큼 거기에 각별한 의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명하면서까지 국공합작을 요구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와 명분이 없지 않다. 정부군이 공산당 세력을 토벌하기보다는 서로 손을 잡고 일본군과 싸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데 이어 중국 대륙까지 넘보고 있었다.
더욱이 그 자신 만주 군벌로서 일대를 호령하던 장쭤린(張作霖)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한때 베이징까지 장악했던 장쭤린이 1928년 봉천에서 열차 폭파사고로 숨진 것이 바로 일본군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일본의 만행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랴오닝 선양(瀋陽)에 보존되어 있는 장쉐량 부자의 옛 저택을 비교해 보면 당시 그들이 누렸던 권력과 재산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부지 면적만 해도 1만평 이상이라 하니 가히 궁궐에 버금갈 만하다. 그때 이미 장쉐량은 군벌을 관할하면서도 틈틈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러한 부귀영화를 일본의 침략으로 잃게 되었고, 끝내 부친의 목숨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쉽사리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가택연금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때인 1990년 6월 1일 그의 생일날을 기해 풀어졌다. 일종의 생일선물이었던 셈이다. 장제스와 그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타계할 때까지도 풀리지 않던 연금이었다. 중화민국 정부가 본토를 잃고 대만으로 쫓겨온 것이 장쉐량의 항명 탓이라고 간주한다면 오히려 가택연금으로도 처벌은 부족했을 법하다.
이렇게 연금에서 풀려난 그가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이 1993년 12월에 이르러서다. 고령임을 감안한 대만 정부의 마지막 해제 조치였다. 부인 자오이치(趙一荻) 여사와 하와이 호놀룰루로 옮겨 동생 장화이민(張懷敏)에 얹혀 살던 그는 2001년 10월 노환으로 사망했다. 부인이 눈을 감은지 한 해 뒤의 얘기다. 햇수로 따진다면 무려 103살이 되도록 살았지만 연금 기간을 제외한다면 자유로운 삶은 기껏 50년에 그쳤다.
관심을 끄는 것은 장쉐량 개인에 대한 연민보다는 그의 행적에 대한 대만 사회의 인식이다. 이를테면, 대만 국민들이 시안사변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쉐량이 그때 장제스의 명령을 받들어 마오쩌둥 세력을 끝까지 몰아붙였다면 지금의 중국 상황은 딴판으로 달라져 있을 것이 틀림없다.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외교관계도 지금처럼 옹색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에 대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홍콩 사태를 바라보며 ‘하나의 중국’ 개념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란을 벌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일본이 전체 중국 대륙을 집어삼킬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침 중국 사회에서도 그동안 적으로만 간주했던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벌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중국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과거 국공합작에 의한 장제스의 항일노선을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대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필요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대만 내에서도 독립론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쑨원(孫文)과 장제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에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장쉐량이 거주하던 옛 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과거에도 한동안 공개했다가 태풍 피해로 훼손됐던 것을 고쳐서 다시 공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작은 에피소드를 놓고도 전체 분위기를 주시해야 할 만큼 상당한 변수를 지닌 것이 바로 요즘의 대만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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