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기념일’ 외면하는 대만 사회의 속사정
[아시아엔=허영섭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지난 25일은 ‘대만 광복절’이었다. 1945년 10월 25일,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날 타이베이에서 ‘대만반환 조인식’이 열렸고, 마지막까지 대만총독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안도 리키치(安藤利吉)가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측근인 천이(陳儀) 푸젠성 주석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했다. 일본이 대만 통치를 끝내고 전면 철수한다는 포기 선언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넘겨주었던 대만이 5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해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까지 결사항쟁을 외치던 일본이 결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로부터 70일이 지난 뒤였다.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정식 서명한 9월 2일로부터는 또 50여일이 지나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타국으로부터 점령한 영토를 모두 원래 소속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따른 결과였다. 대한민국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화민국으로서는 앞서 두 회담의 참가국으로서, 그리고 참전국의 일원으로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셈이었다.
해방을 맞는 기쁨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고 달랐을까. 그때 전체 680만 명에 이르던 대만 주민들 또한 외세의 억압과 수탈로 곤욕을 치르다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는 기대감으로 마냥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그동안 대만에서도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려고 적잖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해방으로 인한 주민들의 흥분과 희망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그로부터 7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대만 국민들의 심사는 과연 어떠할까. 그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교훈이 계속 전달됐으련만 지금은 그러한 감흥이 거의 가라앉은 듯하다. 무관심 차원을 떠나 오히려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는 것이니, 세월에 무뎌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중화민국 통치로 환원됐다고 해서 과거 식민시절보다 더 나아진 게 없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시대적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지만 하물며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사실을 두고도 이토록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는 게 대만의 현실이다.
광복절이던 지난 25일 국민당 지도부를 비롯한 시민들 1000여 명이 타이베이 쑨원기념관 앞에 모여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는 게 짤막한 현지 소식이다. 참가자들은 일제 치하 당시 독립투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헌화했으며, 또 그중의 일부는 양안(兩岸) 통일 현수막을 펼쳐들고 총통관저가 위치한 케타갈란 거리를 행진했다는 것이다. 아마 대륙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 위주로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날 타이베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기상학적 배경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가 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의 민진당 정부가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대조적이다. 라이 총통은 이날 접경인 진먼다오(金門島)를 방문해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의 공격에 맞서 국민당 군대가 진먼다오를 지켜낸 구닝터우(古寧頭) 전투 75주년을 기념했다.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섬으로 망명한 직후 일어난 전투였다. 라이 총통은 당시의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 중국이 다시 공격해 오더라도 대만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지난날 식민통치에서의 독립을 중국 침략으로부터 독립으로 치환한 셈이다.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의 입장에서 중화민국 통치를 받게 된 자체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껏 독립론자들이 대만과 중국 대륙의 역사적 연관성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려는 태도를 보였던 게 비슷한 맥락이다. 국민당 지지층을 포함한 중국과의 통합론자들이 주로 대륙에 뿌리를 둔 외성인(外省人)이라면 독립론자들은 토착 내성인(內省人)이라는 차이점에 기인한다. 토착민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들이 대부분 대륙에서 건너왔을지라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넘어온 외성인들과는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내성인들 입장에서는 국민당 세력 역시 또다른 외세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세력이 일본 관리들을 대신해 요직을 두루 차지하게 되었고 과거 일제가 차지했던 기득권까지 빼앗아 가면서 갈등이 심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와중에 1947년 발생한 ‘2·28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 노점상 할머니가 밀수 담배를 팔다가 단속에 걸렸는데, 단속원의 지나친 횡포로 실랑이가 붙은 끝에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게 됐던 것이다. 이에 주민들이 집단시위에 나섰고 결국 본토에서 증파된 국민당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그대로 끝났지만 대만 주민들이 국민당 세력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타이완섬으로 옮겨온 뒤로 내성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착민들을 중심으로 민주체제 확립과 대만 독립을 내세운 민진당이 창당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망명정부가 옮겨온 직후 내려진 계엄령이 38년 만인 1987년 해제되면서 국민당 일당독재에 맞서는 민진당이 창당돼 본격 유세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배경만으로도 민진당 지도부가 일제 치하 당시의 억압과 수탈 여부를 떠나 대만이 국민당 지배를 받게 된 데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진당이 대만 독립을 외치면서 자기들에 유리한 역사적 사실들만 내세워서는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전체 역사를 외면하고 단편적인 사실들로 꿰맞추다가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광복절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지라도 이를 부인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반대편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싫으나 좋으나 역사는 역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