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차이잉원 민진당, ‘쑨원과 장제스 흔적’ 왜 지우려 하는가?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주간] 지금껏 대만에서 ‘국부’(國父)로 칭송받아 온 주인공이 쑨원(孫文)이다. 대만이 중화민국의 뿌리를 이어받았고, 중화민국을 세우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청나라를 타도한 1911년의 신해혁명에 앞장을 섰다. 지금도 각 관공서와 학교마다 쑨원의 초상화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위에 걸려 있는 데서도 국부로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쑨원이 중화민국을 세웠다면 국가의 기초를 닦은 것은 장제스(蔣介石)다. 황푸(黃?)군관학교를 설립해 군사력을 키웠으며,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맡아 난립하던 군벌을 제압하고 난징(南京)에 정식으로 정부를 세운 공로자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연합군과 공동전선을 펴기도 했으며,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장기간 총통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러나 요즘 이들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국민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차지한 민진당으로서는 대만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 바탕에는 대만의 역사가 중화민국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를테면, 역사를 바로잡는 차원이다. 이미 민진당이 정권을 잡았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당시 부분적으로 추진됐던 작업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 2월 개원한 새 입법원에서부터 이뤄지고 있다. 민진당이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입법원도 동시에 장악하고 있으므로 상당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양상이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자가 오는 5월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면 더욱 가속도를 낼 전망이다. 역사 인식에서부터 대륙 시절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정체성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뜻이다.
우선은 쑨원을 국부의 위치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 민진당의 의도다. 관공서마다 쑨원의 초상화를 걸도록 규정한 법률의 개정안이 최근 입법원에 제출된 것이 그 시작이다. 국가상징 및 국기에 관한 법(中華民國國徽國旗法)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공직자들의 취임 선서도 국기와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에 대해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흔적을 없애려는 술책”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나 열세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러한 시도는 과거 천수이볜 총통 때도 있었으나 국민당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민진당이 총통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입법원 의석에서는 여소야대 국면이었기에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움직임은 그때의 연장선인 셈이다. 당시 민진당은 각급 학교에 게시됐던 장제스와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초상화를 떼도록 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2002년의 일이다.
이런 공식적인 의례를 떠나서도 일반인들이 쑨원에 대해 생각하는 국부로서의 인식은 상당히 퇴색된 게 사실이다. 그동안에는 초중고교 학생들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고개를 숙여 3배를 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나 지금은 학교에 따라 이런 규정이 철폐된 상태다. 교장의 재량에 맡겨진 결과다. 특히 민진당 세력이 강한 가오슝 등 남부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뚜렷이 나타나는 추세다.
특히 대만의 역사에서 쑨원의 역할을 살펴보면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가 생전에 대만을 직접 방문한 것이 1900년, 1913년, 1918년 등 세 차례로 기록돼 있는데, 대만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을 때였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방문은 당시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총독에게 중국 대륙의 정치적 혁명에 대한 도움을 받으려고 들렀다는 것이니,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에 동조했던 게 아니냐는 눈총까지 쏠리고 있다. 그는 1924년에도 지룽항에 기항했으나 내리지는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제스에 대한 일반의 반발감은 더하다. 그가 오랫동안 총통으로 군림하면서 가혹한 독재정치로 국민들을 괴롭혔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1947년 있었던 2·28사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아직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오기 이전의 일로, 이때 감금되거나 처형된 인원만 해도 무려 2만8000명에 이른다. 70년이 지나간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한 본성인(本省人)들의 반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취임하게 되면 2·28사태 당시의 문제점과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장제스에 대한 책임 문제를 분명히 가려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때부터 관련 조사가 진행돼 왔으나 그동안의 조사로는 미진하다는 얘기다. 2·28사태 조사를 계기로 계엄령 치하에서 이뤄졌던 백색테러의 실체가 밝혀질지도 두고 볼 일이다.
현재 사용되는 국가(國歌)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장제스 시대의 낡은 유물을 치워 버리려는 움직임의 하나다. 국가의 가사가 “삼민주의는 우리 당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三民主義 吾黨所宗)”로 시작되는 것부터가 민진당의 입장에서는 거슬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 당’이란 국민당이기 때문이다. 1924년 황푸군관학교가 문을 열 때 쑨원의 연설문에서 가사를 따왔으며, 이것이 그뒤 국민당 당가로 채택됐다가 저절로 국가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쑨원을 국부로 추앙하게 된 배경에는 장제스의 개인적인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쑨원을 내세워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했다는 관측이다. 쑨원이 1925년 타계했으나 그가 국부로 정식 추앙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에 이르러서라는 사실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 측에 가담하고 있던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宋慶齡)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앞으로 민진당 정부에서 쑨원과 장제스의 흔적을 어떤 식으로 지우게 될 것인지 지켜보게 된다. 그것이 대만의 국가적 정체성을 세우려는 노력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존 국민당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인지도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