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길] 최재훈 경인일보 기자 “2002 효선이 미순이 사건은 내 인생의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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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기자가 해외출장 중 잠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시아엔=최재훈 <경인일보> 기자] 고향을 떠올리면 지금도 코끝에 사과 내음이 물씬 느껴진다. 경상북도 예천, 둘러보면 사과밭 밖에 없던 시골마을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5남매 중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 터울이 한참 나는 누이들 이렇게 7식구가 쓰러질 듯 낡은 초가집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집에 전기가 들어온 게 일곱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온종일 농사일에 매달려 자식 돌볼 겨를 없이 바삐 사셨지만 형편은 늘 제자리였다. 해가 지면 가족들이 어둑한 방 안에 둘러앉아 멍든 사과로 저녁 끼니를 때우던 날들은 지금도 기억 한구석에 선명히 남아있다.

초등학교 4년때 고향 떠나 의정부로···“낯선 미군들 눈빛 속 내가 차라리 이방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부모님은 희망 없는 고향을 등지기로 했다. 1980년 초등학교 4학년 때 탈출하듯 고향을 떠나와 우리가 안착한 곳은 경기도 의정부였다. 이곳은 들과 강밖에 보이지 않던 고향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었다. 태어나 그렇게 많은 자동차를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당시 미군부대 여러 곳이 의정부에 자리하고 있던 터라 파란 눈의 외국인을 본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어린 시골 소년의 눈에 비친 도시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시골 전학생에게 도시의 학교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또래들의 텃세를 견뎌야 했고 시골학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앞선 학업수준을 따라가야 했다. 무엇보다 혼자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게 가장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은 잠시였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어디선가 강해져야 한다는 호기가 솟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주먹다짐도 다반사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친구도 생겼고 나름 학교생활도 적응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익숙해진 도시생활은 모든 걸 바꿔놓았다. 어린 시절 순수했던 시골소년의 착한 맘은 오간데 없어지고 점점 반항적으로 흘러갔다. 이유 없는 반항심은 사춘기에 접어들며 더욱 심해졌다. 부모님은 시골에서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런 가난이 싫어 심성은 갈수록 삐뚤어졌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툭하면 싸움질에 나쁜 짓을 일삼았다. 소위 말하는 ‘문제아’가 바로 나였다.

10대 반항 이겨낼 힘 준 운동과 그림

10대의 반항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운동과 미술뿐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잡념이 사라졌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에 점점 빠져들면서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본 나의 모습은 너무도 나약하고 형편없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했는지 후회가 몰려오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자괴감에 휩싸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대학에 가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당시만 해도 의정부는 비평준화 학군으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다들 입학을 꺼리는 학교였다. 당연히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노력과 의지로서는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대학에 갈 거라고 공언했을 때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해주는 이 없었다. 도리어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해댔다. 그럴수록 더 이를 악물었다. 목표는 당시 전국 미술대학 중 1~2위를 다투던 홍익대 미대였다. 집안에서조차 반대하는 꿈이었다. 대학을 보낼 만한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악조건에서 사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기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꿈을 접을 수 없어 후기모집의 지방 미대에 진학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들어간 대학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그림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없는 상황까지 맞게 됐다. 극심한 가난과 복잡하기만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군 입대 뿐이었다. 2학년을 마치마자 곧바로 입대했다.

전자제품 회사 다니다 전문대 사진학과 입학

전역해서는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복학의 희망은 일찌감치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우연히 군 복무 중 알게 된 전자제품 PCB(회로설계) 제작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연구소에서 개발을 하다, 차츰 일을 알게 되어 영업부로 옮겨 본격적인 영업를 하나하나 배워갔다. 낯선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해야 했기에 편안함을 좇을 수 없었다. 일은 차츰 익숙해졌고 아내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 바라던 안정을 이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못 다한 공부에 대한 아쉬움으로 늘 허전했다. 가정을 뒤로 하고 내 꿈만을 위해 안정적 직장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사진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전문대 사진학과에 진학해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과 캠퍼스를 정신없이 오가며 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기자라는 직업은 어릴 적 처음 본 도시처럼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욱 도전할 의욕이 샘솟았다. 그때부터 현직에 있는 기자들을 쫓아다니며 기자가 되는 방법을 물었고 결국 해보기로 작정했다.

서른 넘어 경인일보 입사···“꿈은 땀과 도전 없이 못 이룬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사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었고 마침내 지금의 직장인 경인일보에 입사하게 됐다. 서른이 넘어 발을 디딘 기자 세계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마치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배울 것도 많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나이 어린 동기, 선배들에게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출퇴근도 쉽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수원 본사까지 왕복 5시간 거리를 매일같이 오가야 하는데다 수습기자에게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 잠은 하루 4시간을 넘지 못했다. 회사에서 쪽잠을 자는 일도 다반사였다. 수습기간은 지옥훈련이나 다름없었지만 뒤늦게 찾은 꿈을 위해 오기와 끈기로 버텨야만 했다. 일이 고될수록 기자에 대한 갈망과 열정은 더욱 커갔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힘들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6개월의 수습과정과 6개월의 본사 근무를 마치고서야 수습 딱지를 떼고 의정부에 배치됐지만 고달픔은 끝이 아니었다. 혹독한 고난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 국장 1명과 차장 2명의 선배들을 보필하며 매일같이 특종과 낙종의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기사전쟁을 치러야 했다. 일과가 끝나면 몸은 녹초가 되고 고달팠지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기자이력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2002년 6월 한일월드컵이 절정에 달하던 때, 양주에서 여중생 두명이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사고 기사일 수 있었지만 앞서 반미감정이 악화일로에 있던 때라 쉽게 봐 넘길 사건이 아닌 걸 직감했다. 반미시위는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시위도 격해지면서 하루하루가 놓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을 사진과 기사로 남기는 기자의 사명감을 비로소 생생히 체감할 수 있었다.

“네가 어떻게 기자가 되냐, 기자는 아무나 하냐?” 비아냥이 되레 고맙기만

처음 기자가 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아냥거렸다. “네가 어떻게 기자가 되냐, 기자는 아무나 하냐?”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내 길을 걸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남몰래 많은 눈물도 흘렸고 그 이상으로 피땀을 흘려야 했다.

단순 교통사고로 끝났을지도 모를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반년 가까이 매달린 결실이 돌아왔다.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해 시상하는 ‘이달의 기자상’에 이어 ‘한국기자상’ 수상이라는 생애 첫 감격스러운 영광을 안게 됐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고 스스로가 대견하기만 했다. 진짜 기자생활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기자로서의 근성을 배웠고 무엇보다 기자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이후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일에 전념했다.

피감사기관 공무원들이 감사기관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았고, 미군부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기지촌 여성들의 한 많은 인생을 세상에 알렸다. 때론 역겨운 사회부조리에 분노가 치밀기도 했고 때론 사회의 냉대 속에 소외돼 사는 안타까운 삶에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건 기자는 글과 사진으로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

효선이 미순이 사건으로 ‘한국기자상’···기지촌할머니들은 내 이웃이자 한가족 ? ??

이처럼 열정으로 불태우던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찾아왔다. 2006년의 일이다. ‘안면 중추신경마비’, 흔히 말하는 구안와사가 발병한 것이다.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찾아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도 없지 않았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에 매달린 댓가였다. 그러나 일을 손에 놓을 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던 중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관련해 미군 고위장성이 가족들에게 사과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기자 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가만히 누워서 놓칠 수 없었다. 환자복을 한 채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현장을 찾아 고개 숙여 사과하는 미군장성의 모습을 보도했다. 주한미군 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에 파장은 컸다. 이러한 점이 높이 평가돼 연속해서 기자상을 받게 됐다.

돌이켜 보면 2002년부터 최근까지 한국기자상, 이달의 기자상, 이달의 사진기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기적같은 일은 아마 열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기자로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고부터는 다하지 못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생겼다. 법학과에 편입해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군공유지특별법 제정방향’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다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했다. 힘이 들 때면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 과정에 다니고 있다.

열정과 집념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배고픔과 아픔을 잊게 했고 힘듦을 모르게 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난 그저 일상에 파묻혀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열정이 남아 있다면 앞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어려운 사람들 심리상담을 하며 못 다한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

 

미군들이 효선이 미순이 추모비 앞에서 묵념하는 장면을 최재훈 기자가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으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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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기자는 의정부와 동두천 등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소상인들의 삶을 자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은 미군의 대폭 감소로 생계가 막연해진 상인들을 최 기자가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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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기자는 의정부와 동두천 등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소상인들의 삶을 자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은 미군의 대폭 감소로 생계가 막연해진 상인들을 최 기자가 담은 것이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발생한 효선이 미순이 사건 당시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 학생들을 최 기자가 카메라로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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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로 두번이나 쓰러진 최재훈 기자는 “다시 태어나도 기자의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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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최재훈 기자(뒷줄 맨왼쪽)가 포상으로 카자흐스탄 방문 기회를 얻었다. 2003년 6월 알마티 한국문화원 앞에서 동료 수상자들과 고려일보 기자들이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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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할머니들의 무거운 발걸음에 늘 동행하며 살펴온 최재훈 기자의 따스한 마음이 이 사진 한장에 깊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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