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70년···사라진 그들 ‘기지촌 할머니’
[아시아엔=글/사진 최재훈 <경인일보> 기자]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세계사에 보기 드문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피와 땀과 눈물을 아끼지 않은 국민들이 곳곳에 있다. 한국전쟁 후 보릿고개를 넘으며 하루 두끼도 쉽지 않던 6.25전쟁 직후부터 시작해 1960~70년대, 달랑 몸뚱이 하나만 갖고 미군기지촌으로 뛰어든 꽃다운 여성들이 있었다. ‘양공주’ ‘양색시’라는 손가락질과 사회의 냉대 속에서도 이들은 가족 생계을 맡고 동생들 학비를 대는 등 한 가정의 ‘효녀’이자 ‘누나’였다. 나아가 한국경제의 밑거름이 된 ‘달러벌이의 주역’이기도 했다.
대부분 빈민층 여성들로 먹고 살기 위해 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군기지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지촌은 의정부와 동두천 등 미군부대 주변에 형성됐고, 여기서 달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미군철수가 진전되면서 기지촌 할머니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큰 변화를 몰고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윤금이 피살사건’이다. 윤금이 피살사건은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당시 26살 윤씨가 주한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한 것을 말한다. 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과다출혈이었다. 윤씨 시신의 자궁 내부에는 두 개의 맥주병이, 음부에는 콜라병이 절반쯤 꽂혀 있었다.
이 사건은 주한미군 범죄가 일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운동의 큰 계기가 되었다. 범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교도소에 수감·복역 중 2006년 8월 14일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했다.
사건과 함께 주한미군이 빠지기 시작한 2003년 이후 파주·동두천·의정부 등지의 미군기지촌에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친다. 이런 가운데 기자는 2007년 기지촌 할머니들 취재에 나섰다. 2002년 6월 월드컵 기간 중 미군 장갑차에 의한 미선·효선양 압살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는 미군기지촌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던 차였다. 지금부터 꼭 13년 전 일이다. 기자는 기지촌 여성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의정부시 고산동 스탠리 캠프 주둔지 인근 ‘빼벌’ 마을과 캠프 레드클라우드 주변에 위치한 의정부시 가릉동 기지촌(일명 노랑다리)을 취재대상으로 선정했다.
물론 지금은 미군이 모두 빠져나가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기지촌 여성들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2007년 당시 의정부, 동두천 등 경기북부의 기지촌 할머니들 실태를 고발한 시리즈 기사는 한국기자협회 주최 ‘이달의 기자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13년 전 기지촌 할머니들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들은 기지촌에 들어와 몸을 판 댓가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지만, 정작 가족들은 대부분 이들을 외면했다. 당시 뺑벌과 노랑다리 두곳에는 70대 할머니 50여명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채 종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 파킨슨병, 위궤양 등 만성 질환으로 앓던 분들이 많은데다 13년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 8순을 훌쩍 넘긴 나이라 생존자는 매우 드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70살을 바라보던 나이의 김씨와 이씨 할머니들의 뒤엉켜버린 사연이 가슴에 저며온다. 북한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혼자 내려와 대구와 부산을 떠돌았다. 만나는 남자마다 그를 기지촌으로 끌고 가려 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결국 서른살 후반쯤 돼서 이곳 노랑다리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두 할머니는 그곳 쪽방에서 40년 넘게 함께 살았다. 이씨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하지만 이씨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이씨 할머니는 “저이랑 한날 한시에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 누가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지금까지 박복했지만 마지막으로 함께 죽는 복이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만 되뇌었다.
기억에 남는 분이 또 있다. 고산동 빼벌마을에서 만난 최복순(당시 56세)씨다. 경상도가 고향인 최씨는 1977년 이곳에 들어왔다. 2남4녀 중 맏딸인 최씨는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온 뒤 의정부 작은아버지 집에서 식모생활을 시작하다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가출해 기지촌 여성이 됐다. 당시 최씨가 들려준 말이다. “한때는 돈을 제법 벌어 여동생 둘을 중학교까지 졸업시켰어. 그런데 동생들이 내가 양공주란 걸 알고는 연락을 끊더군. 딴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10년 전 나머지 동생들이 대구 어디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게 전부야. 이제 와서 가족을 찾으면 뭐 하겠노.”
또 생각나는 분이 있다. 빼벌 첫 기지촌 여성으로 알려진 윤순자(당시 83세) 할머니다. 윤 할머니는 한국전 때 고향인 평북 신의주에서 남편과 시댁식구를 모두 잃고 혼자 서울로 내려와 거리를 전전하다 23살 때 먹고살기 위해 빼벌로 들어왔다고 했다. 이후 흑인 병사와 사랑에 빠져 아들(당시 53세, 지금 생존했으면 70세)을 낳았지만 남편은 얼마 뒤 귀국해버렸고 혼자 힘겹게 아들을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의 눈총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보는 게 괴로웠던 윤 할머니는 결국 초등학교 때 하나뿐인 혈육을 미국으로 입양보냈다. “정말 키워보고 싶었어. 그런데 나 하고 한국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국이 낫다고 생각했지.”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윤 할머니는 위궤양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번씩 의료원을 다닌다고 했다. 2007년 취재 당시 주위에서는 “윤 할머니의 병이 암이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생존했다면 올해 100세다.
한국전쟁 발생 70주년 2020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초겨울 그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린 그들의 삶에 이제라도 이런 헌사를 바쳐야하지 않을까? “할머님들의 희생 어린 숭고한 삶,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진 중간에 계신 할머니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