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단독인터뷰] 베들레헴 최초 여성시장 “팔레스타인, 여성 정치참여 완벽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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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 바분 베들레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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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당선 베라 바분 시장 “한국 지자체와 교류 원해”

남편 이스라엘군에 희생, 영문학 교수로 ‘성 역할’ 연구

[아시아엔=편집부, 윤석희 기자] 지난 7월31일 일본 도쿄도 선거에서 여성 최초로 고이케 지사가 선출된 직후 <아시아엔>은 아시아 각국의 여성 단체장 현황을 조사했다. 이를 통해 중동지역의 여성 단체장이 많은 사실을 <아시아엔>은 확인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 시장이 여성인 점이 눈에 띄었다. 이에 <아시아엔>은 베들레헴 시정부와 접촉해 시장을 인터뷰했다. <아시아엔>은 베라 바분(52) 베들레헴 시장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바분 시장은 “아시아 각국의 기자들이 연합해 만드는 <아시아엔>에 흥미가 많다”며 “특히 본부가 한국에 있다는 점에서 베들레헴 시와 교류하면서 함께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편집자>

-당신은 베들레헴 시 사상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당선됐다. 선거과정에 대해 소개해 달라.

=2012년 실시된 선거과정은 굉장히 생동감 있는 민주주의 과정이었다. 나는 파타당(Fatah)의 제1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선거에 6개 정당이 참여해 4개 정당에서 모두 15명의 시의원이 선출됐다. 팔레스타인 선거제도는 ‘생-라게 방식’(Sainte-Lagu? method)으로 진행된다. 시민들이 시의회 의원을 먼저 선출하고 의회에서 시의장과 시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베들레헴 지방의회는 15명의 의원들 중 8명이 기독교 신자, 무슬림이 7명이다. 시장과 부시장 모두 기독교도다. 나 역시 그리스찬이다. 의회에는 여성 20% 할당제가 적용되어 여성 3명, 남성이 12명이다. 나는 15명 중 9명의 지지를 받아 최초의 여성시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정말 어려웠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선거에 출마하는 남녀 모두 겪는 어려움이 있었다. 모든?캠프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정책을 만들고 이를 홍보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캠프는 4년 임기 동안 실천할 수 있는 공약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선 당시 어떤 기분이었나? 하늘을 날 것 같았을 것 같다.

=그렇다. 너무 기뻤다. 베들레헴 최초 여성시장으로 당선되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팔레스타인 국가에서 두 번째 여성시장이다. 라말라(Ramallah)시에서 2005~2012년 재직한 분이 팔레스타인의 최초 여성시장이다. 따라서 나는 팔레스타인 두번째 여성시장이자 베들레헴 최초 여성시장인 셈이다.

-당신은 여성인권, 특히 아랍 여성의 권리향상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으며 왜 책을 썼나?

=나는 영문학 교수로서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연구를 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문학과 정신분석학을 깊이 연구했다. 자연히 해체주의(종래의 로고스logos 중심주의적인 철학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철학 이론으로, 1960년대에 프랑스의 비평가 데리다가 제창한 비평이론)와 ‘성역할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이런 이론들을 접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의 경우 특히 중동 및 팔레스타인에서는 남성이 언제나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나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삶을 나름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군 치하의 팔레스타인 여성의 삶은 정말 고달프다. 여성들은 남자들이 잡혀가고 순교하는 와중에도 가정을 챙겨야 한다. 내 남편 역시 이스라엘 군대에 체포돼 순교했다. 그래서 나는 가족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 역할 이론’은 나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당신 남편이 이스라엘 군에 체포돼 순교하고 당신은 가정에서 그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나의 삶, 나의 집, 나의 아이들, 나의 학업, 그리고 가정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남편이 숨진 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나는 성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더 많이 가르치고,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여성으로서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부딪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레이스 네트워크’(Grace Network)의 일원이 되었다. 그레이스 네트워크는 중동과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정보 전달 및 소통 기술을 제공해 이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나는 2011년 성 역할 관련 연구를 마치고 아프리카·중동 출신 여성학자 28명과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여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자아확립을 확신하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의사 표현 방법을 익혀갔다. 내 스스로의 자기 표현력이 분명히 서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파타당 제1후보 출마제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다.

-베들레헴 시장직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은 없나?

=베들레헴은 시장 업무를 수행하기에 무척 어려운 도시다. 베들레헴은 지구촌도시인 동시에 팔레스타인 국가의 도시다. 지리상, 인구구조상 굉장히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베들레헴 시를 드나드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시장으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를 가르는 여러 제약들이다. 예수탄생 기념성당, 거룩한무덤성당, 알아크사모스크(Al-Aqsa Mosque) 등 종교시설마저 모두 분리통치되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시 바깥으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된다. 베들레헴 자치구의 주민 20만명 가운데 단 6% 가량만이 베들레헴 외부출입과 노동이 허락된다. 인구 2만5000명의 베들레헴은 실업률이 25%에 이른다. 게다가 주민 81%는 이스라엘 군의 통제를 받는 C구역에 거주해야 한다. 수십년간 베들레헴 주변에 들어선 이스라엘 정착촌만 22개다.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이유다.

-C구역 거주민들은 어떤 불이익이 있나?

=그곳에서는 모든 개발이 이스라엘 정부 허가 없이는 금지되어 있다. 1967년 설정된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서도 모든 개발은 이스라엘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점령군 통치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인적자원 또한 매우 모자라는 편이다.

-시장으로서 당신은 어떤 일들을 해왔나?

=나는 의회와 함께 베들레헴의 공식경계를 설정·공포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개발방식을 도입하고 전체적인 계획을 짜는데 필요했다. 이번 베들레헴 도시계획은 1958년 이후 58년만에 나온 것이다. 그동안 변변한 도시계획도 없이 베들레헴 시가 운영된 것이다. .

-베들레헴 시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

=7.8㎢로 굉장히 좁은 편이다. 베들레헴자치구는 사해까지 이르는 넓은 구역이지만 그 중 81%가 C구역이고, C구역의 49%가 이스라엘군의 감독 아래 놓여있다. 그러니 효율적인 개발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수 없이 많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의 정부 고위층 진출이 가능한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진출해 있는지 궁금하다. ?

=정말이지 너무 자랑스럽다. 팔레스타인 여성으로서, 여성이 정부 고위층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정부에는 이미 관광부장관, 경제부장관에 여성들이 역할을 해오고 있다. 선거과정에 참여할 자신감이 있다면 정부 고위층에서 일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는 수많은 기회를 보았다. 여성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자 과제다.

-베라 바분 시장께서는 팔레스타인의 정치 및 법 제도가 여성의 정치참여를 보장한다고 보시나?

=팔레스타인에서는 법적·제도적으로 여성이 공동체와 국가를 이끌 수 있도록 보장돼 있다. 그렇지만 방금 얘기했듯이 여성 스스로가 먼저 “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기반을 광범위하게 조성해야 한다. 여성이 의회에 참여하는 것만큼 사회변화를 이끌어 가는 의회활동을 경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인, 특히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굉장히 진보적이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현재 20% 가까운 여성할당제를 30~40%로 끌어올려야 한다.

-당신은 아랍계 기독교 신자로서 중동지역의 중요한 롤모델이 되고 있다. 스스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랍계 기독교도로서 시장이 된 것은 오늘날 역사적·인구학적·종교적 배경을 통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성인 나는 문화적으로는 아랍문화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베들레헴에서 수많은 종파와 대학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실현가능한 진보적인 목표들을 제시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도와 무슬림 모두 이스라엘 점령군 치하에서 고통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교육은 권리이자 이땅에서 살아갈 권리를 얻기 위한 의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부모들은 딸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내 부모님 역시 교육에 신경을 상당히 많은 써주셨다.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의 지지 덕분이다.

-이 지역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공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가?

=물론! 팔레스타인 출신의 기독교인 여성으로 나는 팔레스타인 기독교도인들 목소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팔레스타인은 물론 중동전역에 퍼져 있다. 그들은 문명을 창시했으며 수천년 이 땅에서 살아왔다. 팔레스타인 거주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역할을 계량화하기는 어렵다.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세계 여느 나라 국민들처럼 서로 정의롭고 존중받는 삶을 살기 원할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베들레헴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다.

-한국 등 다른 아시아 도시들과 협력할 계획이 있나?

=안타깝게도 현재 계획 중인 것은 없다. 베들레헴은 수세기 동안 국제적인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시아 도시들과 자매결연이나 상호교류는 매우 드물다. <아시아엔> 인터뷰를 보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들이 관심을 보인다면 정말 좋겠다.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도시들과 교류하는 것은 양쪽에 모두 좋은 일이다.

-베들레헴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리라고 보는가?

=두 나라의 갈등은 벌써 63년이나 됐다. 현장의 정치인이자 학자 그리고 시민 입장에서 볼 때, 국제사회가 개입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장벽과 철조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서 이같은 갈등해결이 절실한 문제다. 이스라엘은 1948년 국제사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팔레스타인은 1993년 오슬로협정에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그러나 오늘날 팔레스타인 영토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정착지가 돼버렸다. 1967년 65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지역에 평화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이 하나의 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 역량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나는 “어떠한 해결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지구촌 시민이라면 “왜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국제사회가 개입해야 하며, 그것도 한시 바삐 개입해야 한다.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가 국가로 인정한 이스라엘은 분쟁을 해소하고 점령을 중단할 책임이 있다. 점령군 측과 점령당한 측의 책임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번역 윤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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