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살 청춘] ‘아시아엔’ 박상설 전문기자가 방송 골라서 나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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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구순 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는 35년 전 50살에 암을 극복한 것을 계기로 1990년 중반 이후 방송출연과 신문 인터뷰 등을 통해 제법 알려진 분이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감리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는 암 투병 이후 자신의 소유인 아파트 대신 산과 들에서 텐트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4일 KBS1 ‘사람 사람들’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등 대중매체 출연을 계속 요청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 프로그램이나 출연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삶고 있다. 인문학적 자연주의 삶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유력 종합편성채널이 그의 출연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결코 출연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아래 문답을 보면 그의 인문적 원칙주의를 읽을 수 있다. 기회만 되면 대중매체에 얼굴을 내밀고, 글을 실으려는 세태와의 ‘아름다운 차이’여서 <아시아엔> 독자들께 그의 철학과 삶과 함께 소개한다. <편집자>

방송사: 지난해 KBS ‘사람과 사람들’에 나오셨던 따님 분 인터뷰 촬영 가능하실지 출연여부 확인 부탁드립니다. 구체적인 일정은 지난 번 사전 인터뷰 때 만나셨던 PD가 전화드리겠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박상설: KBS에 출연했던 차녀는 인터뷰 촬영을 거부합니다. 인터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나에게 출연하지 말 것을 강력히 당부합니다. 그 이유는 해당프로를 시청해보니 저질스러워서이고 아빠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이미지 실추를 염려해서라고 합니다. 또한 아빠의 삶을 제약이 많은 TV에 연출시키기에는 시청자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즉 제가 남과 구분되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송사: 선생님 아내분과 손자들은 어떻게 되시나요?

박상설: 처(83세)는 가치관과 성격차이로 나와 영원히 만나지 않습니다. 다툰 것은 아니고 이념적 코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혈통 가족에 얽매어 사는 가족이기주의를 거부하고 문화결정론이 아닌 문화자유론적 삶을 철저히 추구하는 남들과 분명 다르게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삶의 근원은 자유로운 행복이어야 한다는 행동으로 ‘미움 받을 용기’의 길을 당당히 갑니다. 친손자는 33살 디자인 아카데미 강사와 장녀의 외손자(27살)는 미국 시애틀의 의과대학 대학원생으로 특별연구코스에 있습니다. 차녀의 외손자(37살, 35살)은 삼성전자 선임연구원과 공군소령으로 전투기 조종사입니다.

방송사: 선생님의 자녀분 삼남매는 어떻게 되시나요?

박상설: 아들(63살) 두딸(61살 59살)이 있습니다.

 

방송사: 3남매의 결혼시기는 각각 언제인가요?

박상설: 아들과 큰딸은 1978년 작은애는 1979년입니다.

 

방송사: 병으로 쓰러지셨을 당시(1987년) 삼남매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박상설: 아들은 수협에 다니고 장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청 사회복지과 직원(남편은 실리콘밸리 반도체 회사 연구원 물리학박사)이었습니다. 차녀는 카타르에 거주하며 현지 학생에게 피아노레슨을 했습니다. 사위는 한국은행 직원으로 카타르에 주재했구요.

 

방송사: 자녀결혼식을 케이크만 놓고 하자고 하셨을 때 선생님 가족과 사돈댁의 첫 반응은 어떠셨나요? 구체적으로 부탁드립니다.

박상설: 우리 가족은 기존의 결혼인습 즉 시집식구에게 예물주기, 함 선물, 결혼식 날 음식대접과 신랑 달아매고 괴롭히기, 부조금 받기, 폐백 등을 지극히 혐오해온 터여서 제뜻에 찬동했습니다. 만일 결혼식에서 부조금 접수대 놓고 돈 받는다면 결혼식 도중에 뛰쳐나가겠다고 농담 같은 진담을 즐겼습니다. 사돈댁도 결혼 전 교제할 때부터 당사자와 가족이 잘못된 결혼행사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내세워 양해가 됐습니다. 당시 나의 누님은 현직 국회의원이었는데, 누님이나 어느 친척에게도 결혼식을 알리지 않고 가족만 참석해서 치렀습니다.

 

방송사: 다니던 회사의 직함이 무엇이었나요?

박상설: 부평 산업공단에 있는 무역 및 기계생산 수출회사였습니다. 거기서 상무이사·사업본부장을 했습니다.

 

방송사: 당시 회사에서 어떤 사람으로 불리셨나요? 자녀 결혼식과 같은 경조사를 알리지 않았을 때 무슨 말을 들으셨나요?

박상설: 당시 나이 50세로 왕성하게 업무에 열중하는 ‘불똥 깐돌이’로 불렸습니다. 회식 같은 것을 하면 따라가되 그네들과는 별도로 인근 서민식당의 칼국수 등으로 식사를 때웠습니다. 그래도 누구하나 비난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지문처럼 습관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한국 직장인의 회식습관 즉 술잔을 돌리고 술을 강요하며 2~3차 노래방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그래도 왕따 당하지 않고 늘 책을 뒤적이고 산에 다니는 이 깐돌이를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가 <죄와 벌>에서 “진정한 양심이 재판장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나는 지난 50년간 한눈 팔지 않고 주말농장을 캠핑으로 몸을 던져 씨 뿌리고 호미질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도 20만 그루 심어왔으니 누구 한사람 나에게 시비 걸고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회사 직원이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경조사를 알리지 않는 것을 백안시하거나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내가 만사 하는 일이 인습타파인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의 허무나 좌절·갈등·번민 따위를 걷어치우고 순간을 살아내고 뒤돌아보지 않는, 마치 자연처럼 사는 나를 보며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심플 라이프의 의 삶을 부러워했습니다. 이 다짐은 나의 자랑 아닌 나의 삶의 구도의 길일 뿐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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