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대만 이야기] 차이잉원 도덕성 시험하는 ‘파나마 페이퍼스’

[아시아엔=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폭로로 촉발된 ‘파나마 페이퍼스’의 여파가 대만에도 밀어닥쳤다.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자의 오빠 차이잉양(蔡瀛陽)이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명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의 부패를 질타하며 대만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해 온 차이잉원의 도덕성이 취임 전부터 도마에 오른 셈이다. 그녀는 내달 20일 정식 취임하게 된다.

차이잉양이 파나마에 ‘코피 리미티드(KOPPIE LIMITED)’라는 명칭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은 2008년 1월. 현지의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 법률사무소를 통해서였다. 당시 차이잉양은 “금융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파나마에 역외 기업을 설립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이듬해 투자계약을 해지했다”며 변호사를 통해 해명했다. 탈세나 자금세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뒤로 관리비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아 완전히 청산된 것으로 생각했다”며 “최대한 빨리 청산을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점은 여전하다. 만약 사업에 성공했더라도 세금을 빼돌리는 일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애초부터 그릇된 의도를 갖고 파나마에 회사를 설립한 게 아니냐는 얘기다.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떳떳할 수 없는 일이다. 일반인이라면 모르겠으나 차이잉원 당선자의 오빠이기 때문에 결과와 관계없이 원래 의도를 추궁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당이 차이 당선자의 해명을 촉구하며 공세를 펼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차이잉양의 해명으로는 석연치가 않다. 금융상품에 투자할 목적이었다면 굳이 파나마에 역외 회사를 세울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다. 결국 대만 법률에 따른 감독과 규제를 벗어나려는 속셈이 깔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업이 실패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라는 얘기다.

국민당 측은 여기서 더 나아가 차이잉양이 과거 위창바이오테크(宇昌生技) 투자의혹 사건에 관여됐다는 전력까지 들춰내 공격을 퍼붓고 있다. 차이잉원이 천수이볜(陳水扁) 정부에서 행정원 부원장을 지내던 당시 국가발전기금(國家發展基金)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 신생 회사에 투자하도록 했다는 의혹사건이다. 공교롭게도 차이잉원은 행정원 부원장에서 물러난 뒤 이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은 바 있다.

당시 논란이 확대되면서 차이잉원의 가족들이 위창바이오테크에 함께 투자했으며, 오빠인 차이잉양도 여기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끝에 차이잉원이 결백하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이처럼 사건이 모두 종결되기는 했지만 이번 페이퍼컴퍼니 의혹을 계기로 차이잉양에 대해서만큼은 다시 문제를 삼겠다는 것이 국민당 측의 의도로 여겨진다.

이번 명단 폭로를 계기로 차이 당선자의 가족관계도 다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녀가 집안에서 11남매 가운데 막내로서 차이잉양은 둘째 오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차이제셩(蔡潔生)이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중에서 마지막 부인 장진펑(張金鳳)이 낳은 4남매 가운데서는 큰오빠가 된다. 의사 면허를 땄으면서도 의사 근무를 포기한 채 사업을 벌이는 중이다. 부동산과 건설업, 호텔사업으로 재산을 이룬 차이제셩은 2006년 타계하면서 자식들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차이 당선자의 오빠가 관여돼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도 대만 국민 중 1만6700여 명이 조세회피처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자체가 충격적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폭로로 모두 200여 국가 및 지역에서 확인된 21만4000여명의 의혹투자 명단 가운데 대만 고객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가운데 명단에 오른 사람이 195명으로 확인된 사실과도 비교가 된다.

그러나 명단에 올랐다고 해서 모두 잠재적인 탈법자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는 게 대만 사회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앞서의 국가발전기금이 비영리 면세 국가기관인데도 명단에 올라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사례로 거론된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차이잉양에게 쏟아지는 눈총은 정치적인 공방 탓일 것이다. 재벌인 팅신(頂新)그룹 웨이잉차오(魏應交) 회장과 가수 출신 기업인 닉키 우(吳奇隆) 등도 명단에 올라 있지만 아직은 평가가 유보되는 중이다.

행정원은 대책 마련으로 분주하다. 기업인들이 해외에 유령회사를 세워 세금을 빼돌리는 수법을 막기 위해 소득세법 개정작업이 심도있게 추진되고 있다. 대만에 설립된 기업은 해외거래 및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하며, 해외지사도 그 소득이 국내로 들어오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과세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안이 유력하다.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의 임기가 한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지만, 가능하면 그 안에 개정안을 처리한다는 게 행정원 계획이다.

대만에서는 그동안 역외 기업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돼 왔으면서도 양안 사이의 투자 문제가 걸림돌로 간주돼 왔다. 양안 간의 투자가 확대되면서 중국 부자들이 대리인이나 제3국을 거쳐 대만에 회피성으로 투자한 경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한 대만 기업인 중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없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국민당 정부가 그동안 이에 대해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난해 8월 양안 과세협정이 체결된 만큼 큰 걸림돌은 해소된 단계다.

이와는 별도로 스위스은행도 대만 지도급 인사들이 은밀히 이용하는 창구로 확인되고 있다. 천수이볜 전 총통 일가가 부패자금을 빼돌려 스위스은행에 예치한 적이 있으며, 이에 앞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당시 프랑스로부터 프리깃 함정을 구입해오는 과정에서 해군 고위 관계자들이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아 스위스은행에 숨겨놓았다가 최근 발각되기도 했다.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이 어떤 식으로 처리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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