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과연 대만을 방문할 수 있을까?
[아시아엔=허영섭 언론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88세 생일을 석달 앞둔 고령에도 무려 열이틀 간에 걸친 해외 사목(司牧) 순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9월 2일 로마를 출발해 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싱가포르 등 아시아 및 태평양 4개국 방문을 마치고 13일 무사히 바티칸으로 귀환한 것이다. 2013년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으로서 45번째 해외 순방이기도 하다. 더욱이 최대 8시간에 이르는 시차와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순방 기간(12일)과 이동 거리(3만2800㎞)에서 자신의 지난 기록을 넘어섬으로써 바티칸 안팎에서 우려했던 건강 리스크를 가라앉히며 건재를 과시한 셈이다.
순방 활동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첫 방문국인 인도네시아에서 동남아 최대 규모 이슬람 사원을 찾아 종교간 대화를 호소한 것부터가 주목할 만하다. 다른 방문국에서도 각각의 처한 사정에 맞춰 빈곤, 환경,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강조함으로써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다만 파푸아뉴기니에서 교황의 방문이 끝난 지 불과 열흘여 만에 금광 개발을 놓고 총격전이 벌어져 20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부족 간 폭력 종식을 강조했던 교황의 호소가 빛이 바랬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교황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오는 26일부터는 나흘간 일정으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방문하게 된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재임 기간 중 과연 대만을 방문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바티칸 내부적으로도 이 문제에 신경을 쓰고야 있겠지만 대만으로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만이 국제적으로 중국의 고립작전 압박에 처한 상황에서 바티칸이 유럽 유일의 수교국이란 막다른 현실을 떠올려보면 그 속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취임한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이 대만 독립론자라는 점에서도 중국의 압력은 거세기만 하다. 대만 정부가 교황의 이번 아시아·태평양 순방에 맞춰 순방 계획을 환영하면서 교황에 대해 타이베이를 방문하도록 사전에 초청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 배경을 이해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바티칸이 대만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가 돼버렸다.
굳이 이유를 달자면, 이번 순방 계획 자체가 4년 전에 마련됐다가 전세계적인 코로나 전염 사태로 미뤄진 것이어서 일정 변경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더욱이 애초 교황의 건강이 염려됐던 터라 순방 일정을 무리하게 늘리기도 어려웠을 법하다. 평소 무릎 통증과 좌골 신경통으로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는 교황은 최근에는 자주 감기와 기관지염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1월 두바이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 모임에 연설차 참석하려다 막판에 일정을 취소한 것도 폐렴 증세 때문이었다. 이렇게 건강 문제를 감안한다면 시일이 흐를수록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만 방문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역대 교황 누구도 대만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만 해도 그동안 한국을 비롯해 필리핀, 미얀마, 태국, 일본, 몽골 등 동남아·동북아 국가들까지 차례로 방문했지만 대만과 관련해서는 아직 의미있는 메시지가 발표된 적이 없다. 이번 순방에 포함된 인도네시아만 해도 역대 교황으로서 3번째 방문이며, 싱가포르와 동티모르는 2번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심지어 북한에 대해서도 초청장을 보내오면 방문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난날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중화민국 정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격을 받아 타이완섬으로 피신한 1949년 이후 대만과 바티칸의 관계가 ‘현상 유지’에 맴돌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중화민국이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맺은 게 1942년이지만 타이완섬으로 피신한 직후인 1951년 바티칸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젖혀놓고 대만을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이처럼 70년을 넘어서는 양국의 외교관계가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바티칸이 대만의 방문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 중국이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래 바티칸과 중국의 관계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지난 2018년 양국이 중국 내 가톨릭교회 주교 임명권을 놓고 합의에 이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보다 1년 뒤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중국을 사랑하며 베이징 방문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소셜미디어에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교황의 대만 방문 가능성은 멀어지는 반면 오히려 중국 방문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는 듯한 분위기다. 최근에는 양측이 대표부를 교환 설치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바티칸으로서는 중국 지하교회에서 숨어 신앙생활을 하는 수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주교 임명권까지 타협하면서 중국에 접근하려는 바티칸의 조치에 대해 신앙적인 판단보다 정치적인 판단이 앞선 게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대만 정부로서는 앞으로도 교황이 타이베이를 방문하도록 계속 초청장을 보내겠다는 입장이다. 교황의 대만 방문이 이뤄질 수 있을지 세계의 눈길이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