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 칼럼] 시리아 평화회담, 내전종식 가능할까?

반정부 투쟁에서 내전으로????

아사드 정권 40년 철권통치의 문풍지 사이로 봄바람이 살그머니 스며들더니 이내 한겨울 삭풍(朔風)으로 변해버렸다. 해를 거듭하면서 그 바람은 온 집안을 헤집어 놓더니 급기야 문풍지 너머로 관망하던 이웃은 물론 먼 친척들까지 찾아와 아예 문고리를 열어달라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 상황이 시리아 내전의 단적인 표현이다.

2011년 아랍의 봄바람이 불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시리아 사태는 단순한 민주화운동이나 반정부투쟁 혹은 장기독재 부패척결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라는 용어가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어린 초등학생의 낙서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 정도로 시리아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바라본 결과다.

아랍의 봄으로 무너진 주변국가들의 정권은 대부분 경제문제나 장기독재로 인한 부정부패가 초점이었다면, 시리아 사태는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가 더 깊게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사태의 해법도 다른 시각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예멘식 해법’으로 풀어야 된다는 방법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시리아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시리아는 지중해를 옆에 끼고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다마스쿠스’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동서를 넘나들면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해온 이른바 ‘전략적 요충지’다. 194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그 도시를 수도로 국가를 수립한 시리아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경험이 풍부한 국가다.

주변국의 문제 외에 시리아 정치의 골격은 ‘바쓰당’에서 찾아야 한다. 1940년 창설된 바쓰당은 1963년 정권을 잡게 되었고 현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이제까지 40년 이상 철권통치가 이어진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주변국가들과 다르게 시리아 사태가 보다 혼미한 상태로 빠지는 배경에는 시리아 자체의 독특한 국내정치의 특색과 이를 기반으로 아사드 정권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요인과 주변국가들과의 관계 또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간략히 말하면, 시리아 국내 바쓰당의 역할, 주변국 이스라엘, 레바논 및 이란과의 역학관계, 강대국 미국과 유럽국가, 그 가운데서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시리아의 핵무기 문제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순 없다.

아랍사회주의 부흥당, 바쓰당의 건재????

시리아 통치의 기본은 ‘부흥 또는 재건’을 의미하는 바쓰당(Hizbul-Ba’ath)에서 찾아야하며, 40년 철권통치가 가능했음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2011년 1월 시작되어 2년을 훌쩍 넘긴 시리아 내전에서 그동안 7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1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음에도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음은 아직 시리아 바쓰당이 건재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물론 7월에 ‘평화협상’이 예정돼 있기는 하지만 시리아를 둘러싼 국가나 정파별 이해관계는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의문이 든다.

바트당의 정식명칭은 “아랍사회주의 부흥당‘으로 1940년 다마스쿠스에서 미셸 아플락이 창설하였다. 바쓰당은 일종의 아랍사회주의 정당으로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창설 당시에는 모든 아랍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여 서구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투쟁으로 아랍민족주의 운동을 기치로 활용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이집트와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 1958-1961)’ 형성이다. 나중에 이라크, 예멘이 참여했지만,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과 바쓰당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3년 만에 ‘아랍통합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예멘 등 국가들이 국기의 바탕색으로 적, 백, 흑 3색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도 당시 통일국기에서 찾아야 한다.

1970년 하페즈 아사드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30년 철권통치를 해오던 하페즈가 2000년 6월 사망하자, 국민들은 그의 젊은 아들 바샤르를 반기며 ‘다마스쿠스의 봄’을 기다렸다. 부친의 사망과 동시에 바샤르 알-아사드는 35살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직에 올랐다.

사실 바샤르는 의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서 유학중이었는데 후계자였던 형이 199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자 귀국하여 착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아왔다. 유학시절 서구문물을 체험한 그는 대통령 직을 승계하자마자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언론 통제를 완화하면서 일련의 개방, 개혁조치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 조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아버지의 철권정치는 곧바로 계속되었다. 2001년부터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은 다시 시작되었고 집권 ‘바쓰당’의 독재 정치체재가 유지되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국가비상사태법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3년 이라크전쟁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EU)의 경제제재조치와 석유금수조치는 오히려 아사드 정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국민이 기다리던 ‘다마스쿠스의 봄’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그 배경 또한 외세개입을 반대하는 바쓰당의 뿌리 깊은 ‘아랍사회주의’ 인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적대국 이스라엘과 버팀목 러시아가 문제해결의 열쇠

시리아 문제 해결의 열쇠는 주변국 이스라엘과의 갈등문제와 버팀목으로 작용하는 러시아의 태도에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시리아는 왜 이스라엘과 계속 갈등을 빚고 있으며 2년 이상 지속된 내전 속에서도 아직 버틸 수 있는 저력은 무엇일까? 이 점이 문제의 핵심이며, 시리아사태가 경제문제와 장기 독재정치로 인한 반정부투쟁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골 깊은 갈등문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도 여기서 시작된다. 시리아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들어 리비아에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켜왔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수자원(水資源) 이용 및 관리도 있고, 여기에 관계되는 다른 국가들로는 터키, 요르단, 이라크가 개입돼 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레바논은 시리아의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시리아는 1975~1990년 레바논 내전기간 레바논의 치안안정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파견한 뒤 1만4000~1만6000명의 병력을 유지해왔다. 레바논도 이 점을 인정하며, 그 핵심에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가 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맞서 투쟁해온 합법적인 저항단체라며 헤즈볼라를 옹호한다. 헤즈볼라는 22년간 지속돼온 이스라엘의 남부레바논 점령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투쟁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기반을 둔 시아파 무슬림조직으로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고 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전시인 1982년 호메이니를 지지하며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항한 시아파 민병대로 출발하여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의 레바논 점령지에서 저항활동을 하였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는 이란으로서는 대이스라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란이 시리아 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배경도 여기서 찾을 수 있으며 이슬람 종파분쟁도 여기서 파생된다.

보다 큰 문제는 러시아와의 이해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중동지역에서 러시아가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현재로선 시리아다. 그래서 러시아는 항구도시 타르투스에 유일한 해군기지를 두고 시리아를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 있다. 여기에 사회주의 이념을 토대로 시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또한 중동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진출을 모색하며 시리아 편을 들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이스라엘을 등에 업은 미국의 전략과 상충되면서 시리아 내전은 ‘미·러 대리전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멘식 모델’로는 해결이 쉽지 않을 듯????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자 서구열강들은 ‘예멘식 해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집트나 리비아의 경우와는 다르게 시리아 사태는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니라 국제분쟁화 할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그래서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리비아의 경우, 지나친 독선적 행보로 자신을 대변해줄 우호국가가 없었다. 시리아는 2005년 2월 발생한 라피크 알-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국제적 고립이 가속되긴 했지만, 헤즈볼라를 비롯한 이란의 개입과 러시아, 중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아사드 정권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

예멘은 반정부 시위여파로 2012년 살레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알-카에다 이외에는 강대국이나 종파적 분쟁개입이 크지 않아 시리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있는 예멘은 보다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아사드 정권의 퇴진만으로 시리아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예측은 무리가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와의 관계다. 북한은 1966년 시리아와 정식 국교를 수립하고 있다. 하자만 우리의 경우, 아직까지 중동의 유일한 미수교국이 시리아다. 성숙한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비춰볼 때 시리아 사태를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혼란중이긴 하지만 원만한 정상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외교적 역할을 기대해본다. <홍성민 중동경제연구소 소장>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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