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려인마을④] 함박마을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아시아엔=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 아시아발전재단 자문위원] 2022년 11월 29일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1동 함박마을의 역사에 오래 기억될 날이다. ‘함박마을 아카이빙①’ <함박마을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북코리아, 2022.11.29) 출간에 맞춰 구술자와 채록 및 집필자 그리고 마을주민이 함께 모여 “함박마을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소감 나누기 행사를 한 것이다.
함박마을 사람들이 함박마을 사람들 책을 만들다!
2017년부터 함박마을에서 함박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 해온 디아스포라연구소(소장 박봉수)는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 ‘2022년 함박마을 마을기록활동가 양성’ 사업으로 마을주민을 모아 7월부터 8월까지 매주 화요일 오전 10~12시 8회 연수를 가졌다. 필자도 7월 19일 제3회차로 ‘함박마을 사람들,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로 특강을 한 바 있다. 사실상 3개월 짧은 시간에 구술채록과 집필, 책 출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책거리 행사로 떡이 준비된 가운데 박봉수 소장이 지난 5개월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서 참석자들의 소감이 이어졌다.
함박마을도시재생 주민협의체 부위원장인 김덕경님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다소 거부감도 있었으나 책으로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어 보람이다. 디아스포라연구소에서 내년에는 함박마을에 사는 이주민의 이야기, 그리고 3차 연도에 함박마을 백서까지 나오게 될 것이라 해서 기대가 크다”고 소감을 밝혔다. 자작시 ‘고향’을 책에 실은 김경준님은 “여기서 부끄럼 없이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 책을 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이런 분이구나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앞으로는 지나가면서 서로 인사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다. 딸 곽은혜님이 어머니의 생애 이야기를 채록하고 집필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연수1동주민자치회 부회장(전 함박마을공동체 회장)인 이용한님은 “함박마을 이야기가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박봉수님 외 이분들 고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우리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길이 남을 것이다. 나도 사실은 숨기려 했는데, 그렇게 하니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책이 나와 기쁘다”고 밝혔다.
집필자가 ‘작은 거인’이라고 적은 김상선님은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처음에는 함박마을 이야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홀딱 벗겨지는 모습이었다. 나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함박마을의 기록이라고 하니까 함박마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함박마을 1호 통장 이동련이 들려준 함박마을 이야기
8인의 함박마을 사람들 이야기는 각자의 짧은 자서전이자 함박마을의 지난 역사 이야기다. 그 가운데, 사정으로 소감 나누기에 참석하지 못한, 1994년 함박마을에 들어와 함박마을 1호 통장으로 마을의 통장들과 함께 함박마을발전협의회를 만들어 육교를 세우고 버스를 들어오게 만든 이동련의 ‘함박마을, 1호 통장 이동련이 살다’ 후반부는 함박마을 역사 그 자체다.
“여기를 4단지라고 했어요…. 원래는 전원주택단지였어요. 문학산 자락에 있어서 공기도 좋고 터가 굉장히 좋은 곳이에요.… 그런데 어떤 업자가 구청에 가서 허가를 받아와서 원룸으로 짓기 시작한 거예요… 함박마을은 1999년도 되면서 집을 거의 다 지었어… ‘자가용’처럼 생긴 모양에 738개 동이 있어요. 여기는 보통 한 동에 15가구에서 19가구가 살아요… 방이 싸니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거지. 초창기 때는 젊은 층이 많았어요… 우리가 활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서류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기 어렵잖아. 그래서 푸른마을 함박도서관에서 도와줬어… 그렇게 마을이 안정되어 가고 남동공단이 활성화되면서 또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들어온 거지… 여기에 4번 버스가 있어서 일단 교통이 편해서 좋고 방값도 저렴하니까 월세를 놓는 우리도 살게 된 거지요. 그리고 가천대, 인하대, 인천대 다니는 이런 학생들,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그다음 자리 차지하면서 동네가 안정화가 되었어. 이렇게 많은 인구가 살다 보니까 장사가 잘 됐어요… 그런데 IMF 이후 5~6년은 진짜 정말 방 안 나갔어요. 함박마을을 벗어나고 싶어도 집이 안 팔리는 거야… 막 한창 어려울 때 우리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그 빈자리를 또 메워주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고려인들이 아니라 연변에서 온 중국동포들이 먼저 들어왔다가 빠지면서 가까운 동남아쪽에서 태국 필리핀 베트남…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지… 솔직히 외국인들이 메워줬으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먹고살지. 그런데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안 좋아. 이 외국인들이 정말 예의범절이 없어. 자기 나라에서 하던 습관대로 쓰레기 막 버리고 길에 다니면서 담배 막 피워대고 마스크 쓰라고 해도 안 쓰고 주차도 아무렇게 해놓고 전화번호도 남겨놓지 않고… 이번에 여기에서 축제할 때 보니까 참가한 사람들의 70%는 외국인이야. 게다가 다 젊은 사람들인데 애를 다 둘셋씩 데리고 와서 깜짝 놀랐어. 퍼레이드 할 때 보니까 정말 멋있더라고 함박마을이 문화 다양성의 보고라는 것을 퍼레이드 보고 인정했어. 다른 마을에서는 이런 다양성을 찾아볼 수 없는 거잖아. 하지만 주민들의 마음은 냉랭해. 그리고 이번 도시재생으로 짓는 건물도 ‘고려인’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면 안 돼. 여기에 고려인만 사나? 한국 사람을 포함해서 14개, 15개 나라 사람들이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일부 고려인들이 여기를 ‘고려인마을’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함박마을에서 보이는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
‘함박마을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소감 나누기 행사에 초대받은 필자는 함박마을 사람들의 ‘고려인마을’ 명칭에 대한 거부감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사는, 조선시장(朝鮮市場)으로 통했던,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 미유키도오리(御幸通) 상점가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절반 가량인데 ‘코리아타운’이 된 내력을 소개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장도 ‘셔터의 길’이라고 불렸다. 찾아오는 손님이 줄어들어서 문 닫는 가게가 늘어나니까 셔터를 내려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오사카청년회의소와 일본청년회의소가 한국 식재료와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은 지역의 특성을 살린 상점가로 재생시키자는 공동모임을 갖고 ‘코리아타운 구상’을 제창하게 되었다. 처음에 일부 일본상인들은 코리아타운이 웬 말이냐고 반대했으나, 1993년 청사초롱 가로등 등 한국적인 특색을 드러낸 코리아타운 상점가가 만들어졌다.
이쿠노 코리아타운은 이미 오사카의 명소(名所)로 발전했다. 한류 붐이 영향을 끼쳤지만, 일본인들도 오기 시작했다. 일본 수학여행 학생들도 이문화異文化 체험을 위해 많이 찾았다. 상점가의 활성화를 위해서 상점 주인들과 청년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다른 상점가들은 손님 발길이 뚝 끊겨서 문을 닫는 가게가 속출했는데 코리아타운만은 별천지였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코리아타운 축제를 개최했다. 코리아타운 상점가를 찾아준 고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도 학부와 대학원생들과 함께 수년간 방문했다. 2015년 코리아타운 축제 때에는 KBS 월드라디오가 현지 취재해 특집 방송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미 인천의 명소가 된 함박마을은 전국의 21개 ‘고려인마을’ 중에 수도권의 고려인 대표 마을로 자리를 잡고 있다. 재외한인학회 등 국내외 연구단체 연구자들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한국 정착을 희망하는 다양한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귀환 고려인동포들이 인천으로 모이고 있다. 고려인동포의 집거지 함박마을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