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대공황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다①
1933년 시카고박람회
1933년 5월 27일 해질 무렵, 시카고 박람회장 중심 건물인 과학의 전당(Hall of Science) 안쪽 대형 전광판 앞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전광판에 표시된 지도에서는 미국 동부 우주 관측 기지를 나타내는 불빛 4개가 반짝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이 40광년 떨어진 오렌지색 별 아르크투루스(Arcturus)의 빛을 포착하려는 순간이었다.
개막식 주인공은 40광년을 달려온 별빛?
긴장된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천체 망원경이 별빛을 잡아냈다는 “렛츠 고(Let’s go)!” 신호가 울렸다. 한 줄기 별빛이 광전 셀(photo cell)에 모아졌고 증폭 과정을 통해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관람객들은 전광판 위에 선명한 원 모양을 그린 별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에너지로 바뀐 빛은 어둠에 싸인 박람회장을 밝히는 스위치를 켰다. 순간 과학의 전당 옥상에 설치된 대형 탐조등이 켜지면서 흰 빛줄기를 내뿜었다. 서치라이트가 박람회의 주요 건물을 하나씩 차례로 비출 때마다 해당 건물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시카고에서 두 번째로 열린 국제박람회는 이렇듯 밤하늘의 우주 쇼로 문을 열었다. 박람회 최초로 ‘외계의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40광년 거리 떨어진 목동자리(Bo?tes) 일등성인 아르크투루스를 개막식의 주인공으로 삼은 건 40년 전인 1893년 시카고박람회 때 출발한 별빛을 맞는다는 의미였다. 개막식이 시사하듯 이번 박람회는 미국이 유럽을 제치고 세계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 과학의 진보를 주제로 삼았다.
처음 박람회 개최 구상이 나왔을 때 명분은 시카고 시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자는 것이었다. 1833년 43세대 200여 명 거주민이 모피 교역소인 포트 디어본(Fort Deerborn) 마을을 세운 날을 기점으로 시카고 창설을 기념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1927년에 박람회 조직위가 민간단체로 결성되면서 전면 재검토되었다. 은행가이자 석유 재벌인 루푸스 도스(Rufus Daws, 1867~1940)를 의장으로 한 조직위는 기존에 미국이 개최한 박람회처럼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데다가 대중의 흡입력이 약해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박람회 주도 세력은 2년여에 걸친 논의 끝에 ‘과학의 진보’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시카고 창설 100주년과 그 기간 동안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 과학이라는 주제를 절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박람회 개최는 1929년 2월 연방 의회 승인을 거쳐 공식화되었다. 이어 ‘지난 1세기의 진보(A Century of Progress)’가 주제이자 박람회 명칭으로 정해졌다. 이 과정에서 1차 세계대전 때 과학 자문을 위해 설립된 국립연구위원회(NRC)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최고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구성된 NRC는 32명의 위원을 둔 과학 자문 위원회를 결성하여 박람회 조직위와 지속적으로 논의했다.
주제의식 명확한 첫 ‘테마 박람회’
박람회 조직위 의장 도스는 시카고박람회의 콘셉트를 “응용과학과 산업의 발전을 통해 가능해진 인류의 성취를 ‘극적’으로 연출하는(dramatize)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의 진보를 일상에서 실감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처럼 시카고박람회는 명확한 주제를 표방한 최초의 박람회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열린 박람회에 주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명한 주제 의식을 명시하고 전시 내용과 방식까지 총체적으로 초점을 맞춘 경우는 없었다. 과거 박람회에서 흔히 사용되던 유사 품목 비교 전시나 시상 제도를 없앤 것도 큰 주제에 집중하려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런 ‘테마 박람회(theme exposition)’ 개념은 향후 엑스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카고박람회는 1928년 국제박람회기구(BIE) 결성 이후 공식 승인을 받은 첫 국제박람회였다. 박람회 조직위 대표는 1930년 12월 파리 BIE 본부를 방문해 공인을 요청했다. BIE는 31개국이 서명한 파리조약이 발효된 1931년 1월 그 첫 조처로 각 회원국에 시카고박람회 참가를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