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②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
백악관에서 보낸 무선전보로 개막 선언
1904년 4월 30일 루이지애나 기념비 바로 앞 광장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20만 명의 관람객이 운집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높이 38미터의 기념비에는 루이지애나 지역과 미시시피 계곡의 역사를 담은 부조가 새겨졌다. 개막사 낭독의 영광은 박람회 추진의 주역인 프랜시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방대한 전시 규모를 강조하며 이렇게 외쳤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산업, 과학, 예술 진보의 결정체가 다 모였습니다. 만약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서 이 박람회장 바깥에 있는 인류의 모든 성과물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여기 모인 각국 전시물들로 문명을 재건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개막식의 절정은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국방 장관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으로부터 개막 선언을 받는 장면이었다. 워싱턴 백악관에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특별 제작된 스위치를 누르자 개막 선언문이 무선 전보로 타전되었다. 그 순간 박람회장에서는 깃발 1만개가 일제히 게양되었다. 동시에 분수와 폭포가 물을 뿜었고, 기계 전시물이 한꺼번에 작동을 개시했다. 워싱턴을 향해 예포가 울려 퍼지자 흥겨운 밴드 음악이 연주되었다.
개막식을 장식한 무선 전보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통신 기술이었다. 1400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으로부터 무선 신호를 받기 위해 산업의 전당 앞에는 철제 전신탑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왜 국가적 행사인 세인트루이스박람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을까. 그 해 11월에 있을 예정이던 대통령 선거에 박람회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루스벨트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미국 정치사는 기록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그 해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되었다.
비행기·자동차부터 햄버거·아이스크림까지
박람회 전시장은 주출입구와 중앙의 페스티벌 홀을 잇는 동선 좌우에 배치되었다. 뉴욕 출신 건축가 캐스 길버트(Cass Gilbert, 1859~1934)가 설계한 페스티벌 홀은 박람회장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3500명을 수용하는 이 홀은 그 유명한 로마 베드로 성당보다 더 큰 돔을 머리에 얹은 건물이었다. 홀에는 당시 세계 최대 크기였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매일 저녁 콘서트가 열렸다. 외부 회랑은 미국의 초기 13개 주를 상징하는 조각과 비문 등으로 장식되었다. 정면에는 인공폭포 3개가 조성되어 분당 170리터의 물을 쏟아냈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에 출품된 수많은 전시물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분야는 운송 수단이었다. 박람회장 안을 오가는 데 사용된 고가 철도를 비롯해 기차와 자동차, 비행기 등이 중요한 전시물로 대접받았다. 이들 전시물은 교통의 전당(Palace of Transportation)에서 집중적으로 전시되었다. 교통의 전당은 증기엔진 발명 100주년을 기념해 기차역 형태로 지어졌다. 건물 안에는 ‘20세기의 정신’이라는 명칭이 붙은 회전 플랫폼 위에 대형 증기 엔진이 실제로 가동되었다. 미국 서부 개척의 엔진 역할을 한 기차의 위대함을 강조한 전시물이었다.
미국이 한창 개발에 열을 올리던 자동차(motorcar) 또한 주요 전시물이었다. 처음 개발된 전기 동력 자동차를 비롯해 휘발유와 증기 엔진 등 다양한 추진 방식과 외양을 갖춘 자동차 160대가 등장했다. 어떤 자동차는 뉴욕에서 만들어져 박람회장까지 1400킬로미터를 달려왔다는 설명이 붙어 관람객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아직 그 명칭조차 익숙하지 않던 쌍엽 비행기구(flying machine)도 선보였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는 역대 세계박람회 중 가장 다양한 ‘인종 전시’를 자랑했다.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북미 원주민부터 아프리카, 뉴기니의 피그미족,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거인족까지 각각의 인종들을 ‘전시’하고 그들의 ‘원시성’을 구경거리로 삼았다. 인종 전시의 핵심 주제는 ‘원시인’들에게 학교를 세워주는 등 문명의 혜택을 베푼 미국인을 포함한 백인들의 활약상이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중남미와 태평양 일대 식민지 개척에 나선 미국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는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온갖 공산품 외에도 다양한 식료품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스크림이다. 많은 미국인은 세인트루이스박람회 하면 가장 먼저뮤지컬과 아이스크림을 떠올린다. 실제로 박람회장에서 팔린 와플콘 모양의 아이스크림은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관람객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아이스크림콘을 사들고 그 달콤함에 푹 빠져들었다.
아이스크림은 사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 때 처음 개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다는 반론이 있다. 이를 입증하는 문헌도 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이 세인트루이스박람회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세상에 알려져 보편적 가공식품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은 햄버거와 핫도그, 피넛 버터, 아이스 티, 솜사탕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대표적 식품인 이들 먹을거리들은 대부분 개발 연원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전국에서 몰려든 2000만 명의 관람객들에게 노출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세인트루이스박람회 개발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