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③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

전쟁마저 오락으로 만든 놀이공원

박람회 흥행을 위해 당시 박람회 조직위원회가 가장 공을 들였던 파이크 놀이공원

관람객들의 발길이 집중된 곳은 역시 놀이공원이었다. 조직위가 박람회 흥행을 위해 가장 공을 들인 시설 또한 놀이공원이었다. ‘파이크(The Pike)’라고 명명된 세인트루이스박람회장 놀이공원은 입구부터 획기적으로 꾸며졌다. 열차를 타고 들어서면 눈 덮인 알프스 산맥부터 텍사스 사막지대를 거쳐 요정이 사는 동굴까지 통과한다. 배경에 대형 막을 깔아놓은 환상적인 세계 여행 코스였다. 동굴은 실제 바위와 언덕을 뚫어 만들었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3000명의 관람객이 한꺼번에 맥주와 바바리아(Bavaria) 민속음악을 즐길 수 있는 선술집이었다. 이 밖에 에스키모 마을과 이집트 시장, 아일랜드의 귀신 나오는 성, 낙타를 타고 가는 신비의 아시아 등 온갖 오락거리가 흥을 돋웠다.

파이크 안에 마련된 오락물 중에는 심지어 전쟁을 재현한 구경거리도 있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스펙터클한 전쟁’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 가상 전쟁터(Anglo-Boer War)는 6만 제곱미터 벌판에서 600명의 영국군과 아프리카 보어(Boer)족이 싸우는 장면을 실감나게 펼쳤다. 이 전쟁 쇼는 1899~1902년 영국과 아프리카 트란스발 공화국이 벌인 보어전쟁을 모델로 삼았다. 하루 두 차례 공연하는 쇼는 2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보어족 지휘자가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11미터 높이의 폭포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박람회 입장료와는 따로 전쟁 쇼 관람료로 밖에서 구경하는 데 25센트~1달러, 전쟁 상황이 연출되는 마을 입장료로 25센트를 추가로 받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전쟁터 건설비로 4만 8000달러가 든 데 비해 관람료 수입으로 63만 달러를 벌어들인 ‘대박 상품’이었다.

시카고 박람회에서 인기 만점이었던 페리스 휠은 이곳에 옮겨와서도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해진 뒤에 곤돌라를 타고 야경을 보려는 관람객이 많이 몰렸다.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박람회장의 분수와 폭포, 갖가지 조형물과 건물은 형형색색의 불빛 속에 아름답고 환상적인 경관을 빚어냈다.

또다시 엑스포에 곁방살이 한 올림픽

제2회 파리 올림픽에 이어 올림픽은 다시 한 번 엑스포에 휘둘려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올림픽은 이때까지도 행사를 관장하는 국제기구가 없었던 세계박람회와 달리 처음부터 주최 조직이 분명했다. 쿠베르탱 남작이 2대 위원장을 맡고 있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공모 형식을 거쳐 미국 시카고를 제3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했다. 1893년에 대대적인 국제박람회를 치른 경험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자 세인트루이스박람회 주최측이 훼방을 놓았다. 국제행사가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에서 동시에 열리면 관심이 분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박람회 회사와 조직위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별도의 국제 스포츠 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시카고 올림픽 조직위와 IOC에 통보했다. 쿠베르탱 위원장은 결국 박람회 주최측의 위협에 굴복하여 올림픽 개최권을 세인트루이스로 넘겨주었지만 이에 불만을 품고 세인트루이스올림픽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4년 주기를 확립한 IOC의 올림픽 개최연도가 무작위로 각국에서 열리던 세계박람회와 겹친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이처럼 힘겨루기를 통해 ‘빼앗아 온’ 행사답게 제3회 올림픽은 제2회 파리 대회보다 더 맥 빠진 모양새가 되었다. 그나마 개막식은 열렸지만 세인트루이스박람회 회장인 데이비드 프랜시스가 1904년 7월 1일 참가선수들 앞에서 개막선언을 한 것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11월23일까지 5달 반에 걸쳐 2회 때보다 4종목 줄어든 16개 종목의 91개 경기가 분산 개최됐다. 참가국 12개국, 참가 선수단 651명으로 규모도 줄어들었다.

유럽 선수들은 먼 거리를 핑계로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선수들이 참가한 경기는 91개 중 절반도 안 되는 42개 경기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 전체가 국가 대항전이 아닌 개인 혹은 클럽 경합 방식으로 치러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개최 종목은 승마·럭비·조정 등이 빠지고 권투·아령·라크로스·10종 경기 등이 새로 등장했다. 또 농구와 야구가 시범 종목으로 첫 선을 보였다. 올림픽 창설 초기부터 핵심 종목이었던 육상은 약 6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열렸다. 육상 경기장은 박람회 회장의 이름을 딴 프란시스 필드(Francis Field)로 현재 워싱턴대학 스타디움으로 남아있다.

제3회 올림픽의 원시적인 모습은 마라톤 종목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촌극에서 절정을 이뤘다. 박람회장 외곽 비포장도로에서 열린 마라톤은 마차와 자동차가 일으킨 흙먼지 속에서 달리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 결승선에 도달한 프레드릭 로즈라는 선수는 메달 수여식 직후 일부 구간에서 자동차를 탄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실격 처리됐다. 그는 이듬해 보스턴 마라톤에서 정식으로 우승했다. 금메달은 2위로 들어온 토마스 힉스 선수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경기 도중 코치가 건네준 스트리크닌(strychnine)이란 흥분제를 브랜디에 섞어 마신 사실이 드러나 입상이 취소됐다. 힉스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약물복용으로 인한 메달 박탈자로 기록됐다. 경기 중 달리는 그의 양쪽에서 마실 것을 건네는 코치들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전해진다. 쿠바에서 온 우편배달부 출신의 펠릭스 카바잘이란 선수는 경기 도중 주변 목장에서 딴 썩은 사과를 먹고 배탈이 나 땅바닥에 누워 잠들었다가 다시 뛰었는데도 당당히 4위를 차지했다.

개인?단체 대항전의 성격을 띠었지만 메달 획득자를 국적별로 분류한 기록을 보면 미국이 금 78개, 은 82개, 동 79개로 메달 239개를 휩쓸었다. 2위 독일은 13개, 3위 쿠바는 9개 등으로 미국 이외의 참가국들이 따낸 메달 수는 41개에 불과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열린 ‘미니’ 박람회

세인트루이스박람회는 1904년 12월 1일 216일간의 긴 여정을 마쳤다. 세 차례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세계박람회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미국이 기세를 올리던 20세기 초 유럽에서 박람회가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와 이탈리아에서는 소규모 박람회가 잇따라 열렸다. 이들 박람회는 훗날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엑스포로 이름을 올렸지만 규모나 역사적 의미로 보더라도 파리 박람회보다 훨씬 작은 ‘미니’ 박람회였다.

특히 벨기에는 국제박람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국제 사회의 공인과 상관없이 꾸준히 박람회를 개최했다. 1885년 앤트워프(Antwep)에서 첫 박람회가 열린 이래 1888년 브뤼셀(Brussels), 1894년 앤트워프, 1897년 브뤼셀, 1905년 리에쥬(Li?ge), 1910년 브뤼셀, 1913년 겐트(Ghent) 박람회 등이 맥을 이었다. 이 가운데 1905년 리에쥬 박람회 등 4개는 공식 박람회로 인정되었다. 1910년 브뤼셀 박람회는 그 내용보다 행사가 한창이던 8월 14일 대낮에 화재가 나 중앙전시장(Grand Palais)이 전소되는 불운을 맛보았다.

이탈리아도 1902년에 토리노(Turin), 1906년에 밀라노(Milan), 1911년에 다시 토리노에서 3차례에 걸쳐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BIE 공인 엑스포 리스트에 오른 1906년과 1911년 박람회는 산업 전반보다도 자수·공예 장식품과 회화·조각·건축·사진 등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1906년 밀라노 박람회 때는 이탈리아-헝가리 공동 예술 전시장에 불이 나 피해를 입었다.

1911년 토리노박람회는 이탈리아 최대의 강인 포(Po) 강변 발렌티노 성(Valentino Castle) 정원에서 개최되었다. 이탈리아 왕정 복원 5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였다. 박람회장은 포 강변 양쪽 1.5㎞에 걸쳐 조성되었다. 강변 양쪽은 아름다운 2층 다리로 연결되었고, 다리 아래층에는 역대 세계박람회가 낳은 신개발품인 움직이는 보도가 설치되어 명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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