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잠깬 중국의 포효③

2010년 상하이박람회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국기 도안과 날개를 단 비마상으로 외벽을 장식한 북한관. 내부에는 4.5미터 높이의 주체사상탑이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북한, 엑스포 첫 참가…‘번영하는 평양’ 전시

상하이엑스포에는 중국과 ‘형제 나라’를 자처하는 북한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이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 북한은 2007년 7월 상하이 엑스포 참가를 결정한 이래 조선 상공 회의소를 주축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상하이 엑스포 조직위원회와 협의를 벌였다. 북한은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번영하는 평양’이라는 주제로 1000제곱미터의 소규모 전시관을 짓고 ‘조선 인민의 강성대국 건설’을 선전했다.

공식 명칭이 ‘조선관’인 북한 전시관은 한국관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국기 도안과 날개를 단 비마(飛馬)상으로 외벽을 장식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담은 사진이 건물 중앙에 걸렸고, 북한 국호인 ‘조선’ 안내판과 인공기를 나란히 게시했다. 내부에는 4.5미터 높이의 주체사상탑이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평양 대동강 기슭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인 주체사상탑(탑신 150미터, 봉화 20미터 등 전체 높이 170미터) 모형이었다. 그 옆에는 대동강을 표현한 실내 물길이 조성되었다.

주요 전시물은 전통 기와 정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평남 강서군 고구려 고분 벽화 복사본과 고분 모형, 북한이 개발한 로켓 추진체 모형 등이었다. 이밖에 평양의 역사 문물, 현대적 도시 건축물, 민속 문화, 주민 생활 등을 선보였다. 북한은 엑스포 기간 중인 9월 6일 ‘조선관의 날’ 행사를 열고 고위 대표단을 파견했다.

52개 국가관, 다양성과 화합의 향연

영국관은 6만 개 촉수를 달아 낮에는 햇빛을 받아들여 내부를 밝히고 밤에는 내부의 빛이 밖으로 확산되도록 설계했다.

일본은 한국관보다 5배가량 많은 1억 4000만 달러를 투자해 전시관을 지었다. ‘마음의 화합, 기술의 화합(Harmony of the Heart, Harmony Skill)’을 주제로 외형은 보라색 누에고치 모양을 형상화했다. 외벽은 첨단 환경 기술을 동원해 태양열 집적 기능을 가진 비닐 소재로 만들었다. 전시 내용은 기술과 문화,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2020년 미래 도시의 모습 등이었다. 과거사로 인한 반일 감정을 고려하여 일장기 등 중국인에게 반감을 살만한 내용은 철저히 배제했다.

1구역은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일본 문화의 발전 과정 영상, 2구역은 자연과 함께 해온 일본인의 전통 생활 문화와 바닷물을 담수로 만드는 장비 등 환경 기술을 담았다. 3구역에는 초정밀, 초망원 기술로 캐논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원더 카메라’, 복지 지원 로봇, 벽과 일체화된 세계 최대 152인치 텔레비전 등 미래 기술이 펼쳐졌다

BIE 비회원국인 미국은 주요국 가운데 가장 늦게 참가를 통보해 엑스포 조직위의 애를 태웠다. 참가 경비 문제로 인한 논란 때문이었다. 미국은 결국 네트워크 판매회사인 암웨이를 재정 후원사로 정하고 참가를 결정했다. 미국관은 외벽에 설치된 폭포형 미디어 벽과 지붕에 마련된 친환경 정원이 특징이었다. 전시 내용 중에는 언어가 배제된 음악과 효과음, 바람, 냄새, 물방울 등 오감을 자극하는 4D 영상물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영국 전시관 내부까지 연결된 각 촉수에는 다양한 식물 씨를 담아놓아 '씨앗의 성전'이라 불렸다.

각 국가관은 다양한 모티브로 건립·운영되었다. 영국관은 외벽의 6만개 촉수마다 식물 씨의 형상을 담은 ‘씨앗의 성전’으로 지어졌다. 독일관은 ‘조화로운 도시’, 프랑스관은 ‘감성 이미지’, 이탈리아관은 ‘사람과 꿈의 도시’, 캐나다관은 ‘자연 환경과 도심 속 안식처’, 사우디아라비아관은 ‘사막의 오아시스’, 아프리카 연합관은 ‘다양하고 오랜 문명’을 각각 핵심 콘셉트로 삼았다. 43개 국가관 외에도 18개의 기업관이 미래 기술의 각축장이 되었다.

박람회장에서는 개최 기간 내내 세계 각국의 전통과 현대를 보여주는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펼쳐졌다. 거의 매일 각 참가국의 날 이벤트가 이어졌다. 각종 퍼레이드만 900회, 크고 작은 2만여 건의 문화 행사가 관람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행사는 30분 이내로 만들어져 관람객들이 많은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스페인관의 움직이는 초대형 아기 인형. 우리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 있고 그 미래는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관람객들이 대거 몰린 프로그램은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품 음악회, 전 세계 합창 명곡을 모은 합창제, 여러 나라의 거리 공연을 한데 묶은 도시 광장 예술제, 브루나이 전통 혼례식, 사우디아라비아 전통 가무, 터키 재즈, 아르헨티나 탱고 등이었다. 중국의 대표적 문화 수출 상품인 우슈(武術) 공연, 꼭두각시극 서유기, 삼국지 그림자극, 우당 도교 쿵푸 아카데미의 무술 등도 인기 있는 행사로 꼽혔다.

상하이 엑스포에서는 국제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도 여러 차례 열렸다. 그 중 폐막에 앞서 열린 상하이 엑스포 포럼은 개최 기간에 열린 여러 회의를 총정리하는 자리였다. 유엔 사무총장과 각국의 고위 인사, 기업 및 학계 인사 등 참석자들은 이 포럼에서 지속가능한 도시개발에 관한 참가국의 공통 의견을 담은 ‘상하이 선언’을 채택했다.

중국인의 자존심이 용틀임하다

10월 31일 저녁 8시 10분, 상하이 엑스포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 등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폐막식은 개막식에 비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역사적 이벤트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영화배우 류더화(劉德華) 등 중국의 유명 연예인 200여 명이 출연한 공연이 대미를 장식했다. 마지막 날 입장한 관람객 30만 명은 엑스포광장에 설치된 대형 LED 전광판을 통해 생중계되는 폐막식을 지켜보았다. 엑스포 대로에서는 꽃으로 장식한 차량들의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상하이 세계박람회는 규모와 관람객 등 여러 면에서 엑스포의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방문자는 총 7308만 명으로 역대 최다이던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6421만 명을 경신했다. 이 중 외국인 방문자는 전체 관람자의 4.8퍼센트인 35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하루 입장객 수도 10월 16일 103만 명을 기록해 엑스포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0개국과 56개 국제기구가 참여하면서 155개국과 22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던 2000년 하노버 엑스포 기록을 능가했다. 북한과 대만이 사상 처음으로 국제 박람회에 참가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박람회장의 면적도 역대 최대 규모였다.

상하이 엑스포는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은 중국이 올림픽과 건국 60돌 기념식에 이어 공들여 준비해온 ‘중화 민족 부흥’ 3대 행사의 완결판이었다. 중국 정부는 경제 성장의 기폭제이자 국민 통합의 기제로서 엑스포를 활용했다. 대외적으로는 경제·문화강국으로서 중국의 국가 이미지를 한층 드높였다.

중국 정부 당국 발표에 따르면 상하이 엑스포에 투입된 예산은 박람회장 건설과 운영 분야를 모두 합쳐 286억 위안(4조 6300억 원)에 이른다. 이는 중국 국무원에 제출되어 비준 받은 예산을 기준으로 한 공식 수치다. 하지만 교통망 등 사회 간접 자본 확충에 쏟아 부은 투자까지 따지면 최소 3000~4000억 위안에 이른다는 게 엑스포 조직위 안팎의 통설이다.

이에 비해 입장권 판매와 식당 등 부대 시설, 상품 판매, 기업 협찬 등 운영 수입은 200억 위안(3조 4000억 원)에 불과했다. 도시 기반 시설 투자에 들어간 비용까지 감안하면 ‘손해 본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폐막 직후 엑스포로 인한 관광 매출액이 800억 위안(13조 4000원)에 달하며 엑스포 개최로 62만 7000명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었다고 밝혔다.

간접 경제 효과까지 따지더라도 상하이 엑스포는 엄청난 적자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서구 국가 같았으면 언론과 여론의 호된 질책이 쏟아졌을 것이 뻔하다. 어쩌면 준비 단계에서 대회 개최 자체가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을 서구의 잣대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중국은 엑스포를 통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30년 전 개혁 개방의 시동을 건 상하이가 그 용틀임의 선봉이었다. 한 세기 전 무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침탈의 현장이었던 상하이는 이제 세계 무대의 강자로 거듭났음을 선포했다. 중국의 온 국민은 그 포효에 동참했고, 그 공감대 속에 방만한 예산 지출이나 서방 나라들이 줄곧 제기해온 인권 문제 등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과 바다가 합류하는 상하이는 일찍이 서양의 문화와 만나는 무역항이자 비즈니스 도시였고 20세기 초까지 아시아 최고의 금융 허브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미국·영국 등 열강에 조차지(租借地)로 내줘야 했고 1930년대에는 일제에 점령 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중국은 그런 상하이를 세계 ‘부(富)의 허브’로 만들고 있다. 저장성, 장쑤성과 함께 창강(長江) 삼각주 지역을 글로벌 경제 지역으로 키우는 전략의 일환이다. 상하이 엑스포는 중국 최대의 물류·금융·해운·서비스 중심지인 상하이 경제권에 계량조차 어려운 막대한 연료를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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