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대공황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다③
1933년 시카고박람회
훗날 자동차 브랜드가 된 GM관 안내 로봇 ‘폰티악’
시카고박람회는 완성품보다도 제품 공정 과정을 전시하려고 애썼다. 전시 내용은 크게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으로 나뉘었다. 수학·생물학·화학·물리학·지질학·의학 등 기본 원리는 과학의 전당에,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응용 분야는 교통전시관, 전력전시관, 농업관 혹은 기업전시관에 배치되었다. 역대 박람회에서 발전을 거듭해온 디오라마(diorama, 배경을 그려 넣은 길고 큰 막 앞에 여러 가지 물건이나 모형을 배치한 후 조명을 이용해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 기법은 화면과 입체 모형을 활용한 3차원 전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영상을 곁들인 역동적인 파노라마 세트로 진화했다. 예컨대 철도 건설 역사를 다룬 전시물에서 초기 건설자들의 회의 장면이나 철로 개통 장면 등이 소리와 영상을 곁들여 흡사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연되었다. 이를 위해 텔레비전의 원형인 모니터도 개발되었다.
샌프란시스코박람회에 이어 기업전시관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로 관람객들의 흥미를 돋우었다. 제너럴 모터스(GM) 전시관은 폰티악 추장(Chief Pontiac)이란 이름의 ‘기계 원주민’이 관람객들의 안내를 맡아 인기를 끌었다. 첨단 산업 분위기를 한껏 살린 이 안내 로봇은 몇몇 간단한 질문에 대답까지 했다. 폰티악은 훗날 GM의 계열 브랜드명으로 채택되었다. GM은 경쟁사인 포드가 창시한 자동차 조립 라인을 다시 한 번 선보였다.(이미지 3) 싱클레어 석유회사(Sinclair Oil Company) 전시관은 석유 채취 과정에서 발견된 공룡 모형을 여럿 전시해 인기를 누렸다.
당시 박람회에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던 화려한 빛의 향연도 또다시 연출되었다. 한층 발전한 전기 조명 기술 덕분에 집중도 높은 형광등과 네온 가스등이 박람회장을 환히 밝혔다. 박람회장에 설치된 1만 5000여 개 형광등과 서치라이트 등 3000여 개 투광(投光) 조명등은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 제너럴 일렉트릭(GE)이 제공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전력전시관에 온갖 조명 기구로 장식한 21미터 높이의 조명탑 8개를 설치하여 인공 불빛의 장관을 빚어냈다.
금주법 해방을 만끽한 환락의 놀이 공원 ‘미드웨이’
미드웨이(Midway)로 이름 붙은 놀이 공원은 과거 박람회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경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락거리만큼은 역대 어느 박람회에 뒤지지 않았다. 파리(Paris) 거리를 재연한 중앙로를 따라 서커스와 뱀 쇼, 스트립 쇼, 핍 쇼, 각종 민속 공연, 나이트클럽, 댄스 홀, 누드촌, 카지노 등 온갖 유흥 시설이 들어서서 관람객들을 유혹했다. 오락성이 지나쳐 퇴폐적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놀이와 퇴폐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에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공연자들이 외설물 단속에 나선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 오락 시설은 당국의 제재로 문을 닫기도 했다.
시카고박람회의 환락 분위기는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금주법(Prohibition Law) 폐지와 무관하지 않다. 미드웨이 곳곳에 금주법 폐지를 기념하여 공짜 맥주를 제공하는 업소들이 줄을 이었다. 납작한 휴대용 술병(hip flask)을 부츠에 감추고 다니며 몰래 홀짝이던 술(밀주라는 뜻의 ‘bootleg’란 말이 여기서 유래함)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됐으니 비록 경제는 어렵더라도 음주 애호가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축제의 날이었다. 금주법은 1920년 수정헌법에서 주류 매매를 전면 금지시킨, 이른바 ’숭고한 실험(Noble Experiment)’이었지만 술 밀조·밀매와 갱 조직 발호 등 부작용이 너무 많아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 의해 폐기되었다. 금주법은 재즈의 발달과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공유한다. ‘스피크이지(speakeasy)’라 불리는 밀주 판매 술집들이 곧 재즈의 무대가 되었고, 시카고는 뉴올리언스와 함께 재즈와 지하 술집의 중심지였다. 시카고에서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떠오른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바로 이 시대의 상징 인물이다.
시카고 박람회장에는 어린이 전용 놀이 공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마법의 섬(Enchanted Island)’이라 불리는 구역에는 미니어처 열차와 조랑말 목장, 인형 극장 등 어린이 놀이 시설이 빼곡히 들어섰다. 오락 시설과 함께 어린이 도서관과 전시물도 설치되어 박람회가 추구하던 교육 기능이 합쳐졌다. 전문 요원들의 보살핌 덕분에 부모들은 자녀들 걱정 없이 마음껏 박람회를 즐길 수 있었다.
교육적 측면에서 시도된 역사 전시물들은 놀이 공원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조지 워싱턴의 생가, 식민지 초기 개척자들의 주거지, 성조기를 처음 만들어낸 베치 로스(Betsy Ross, 1752~1836)의 집,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 모형 등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되었다. ‘1백만 년 전(A Million Years Ago)’이라는 제목의 디오라마 전시물은 고생대 지구 환경을 실물 크기로 고스란히 재현하여 사람들을 탄복케 했다.
참가 외국관도 이색 전시물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벨기에는 정교한 유리 세공품을 출품했고, 독일은 구텐베르크 활자로 찍은 성서 진본을 전시했다. 멕시코관에서는 가죽 가공 공정을 시연했고, 중국관은 2만 8000개 나무 조각으로 만든 전통 사원 모형을 전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