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①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

당시 박람회 히트곡인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는 40년 뒤인 1944년에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돼 유명세를 탔다. <사진=영화 포스터>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
박람회에서 만나요.
거기 말고 다른 데
불빛 찬란한 곳이 있다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
우리 후치 쿠치 춤을 춰요.
내가 당신의 귀여운 연인이 될게요.
세인트루이스에서 날 만나려거든
박람회에서 만나요.”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 당시에 인기를 끌던 노래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Meet Me in St. Louis)’다. 이 노래는 세월을 두고 여러 가수가 부르다 40년 뒤인 1944년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를 배경으로 여주인공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낸 로맨틱 뮤지컬 영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미국의 연극·영화사에서 고전이 되었다.

박람회는 대중문화 전파의 첨병

비록 훗날의 일이지만 세인트루이스 박람회가 대중문화의 소재로 등장해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띤다. 1876년과 1893년 두 번의 박람회 개최를 통해 무르익은 미국의 상업주의(commercialism)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미국의 국제박람회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기반으로 미국 상업주의의 발판 노릇을 했다. 엑스포는 이제 특정 전문가 그룹이나 이해 집단이 모여 국제 이슈를 논의하는 포럼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 기능은 세분화되어 각 분야별 국제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대신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수많은 상품과 정보에 오락적·교육적 기능을 덧붙였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계박람회의 저울추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부터 1939년 뉴욕박람회까지 총 다섯 차례의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미국은 세계박람회의 흐름을 주도했다. 1900년대 전반의 주요 세계박람회 대부분이 미국에서 열렸다. 이들 박람회는 세계를 대중문화와 대량 소비의 시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1851년 초대 엑스포 이래 반세기의 전통으로 이어져온 ‘평화와 진보’라는 가치는 여전히 국제박람회의 구호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박람회에는 그런 명분 위에 ‘수익’이라는 좀 더 매력적인 관심사가 얹혀졌다.

세인트루이스박람회 기획자들은 유독 ‘교육’이라는 목적의식을 내세웠다. ‘이상적 시민(ideal citizen)’이 되려면 과학 기술 발전에 관해 충분히 교육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들은 사회 통합과 평화를 위해서도 그것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엑스포를 통해 기술 발전에 개방적인 시민을 교육한다는 개념은, 그러나 다른 말로 바꾸면 대중을 ‘좋은 소비자(good consumers)’로 만드는 일이었음이 날이 갈수록 확연해졌다. 기술 혁신에 따른 대량 생산은 대량 소비를 전제로 하며, 소비자는 그 상업주의 메커니즘에서 속수무책의 약자임이 드러났다.

대규모 벌목공사로 일군 ‘아이보리 시티’

시카고박람회를 모델로 삼은 세인트루이스 조직위 역시 정치 지도자보다는 사업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박람회의 주체도 정부 조직위원회와 민간 회사가 역할을 나눠 맡는 미국 특유의 이원화 방식이 유지되었다. 이 가운데 영향력이 더 컸던 루이지애나 박람회 회사(세인트루이스박람회는 루이지애나박람회라고도 불린다)는 사업가 출신인 데이비드 프랜시스(David Francis, 1850~1927)가 회장을 맡았다. 프랜시스는 1896년 미주리 주지사로 재임할 때 아이디어로만 떠돌던 세인트루이스박람회 개최를 연방 정부에 공식 제청했다. 연방 정부는 국제박람회가 무역 진흥과 기술 홍보 외에도 영토 확대와 식민지 개척 등 제국주의적 확장 정책을 둘러싼 논란을 덮을 수 있는 최적의 이벤트라 판단하고 개최를 승인했다. 재원은 연방 정부와 세인트루이스 시, 민간 사업자들이 각각 3분의 1씩 책임지기로 했다.

박람회 주제는 ‘루이지애나 매입 100주년 기념‘으로 정해졌다. 루이지애나란 원래 ‘루이 14세의 땅’이라는 뜻으로, 당시 프랑스가 소유권을 주장하던 이곳을 미국이 매입했다. 이 때 두 나라 간에 이뤄진 토지 거래를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라 부른다.

이로써 미국의 박람회는 1876년 독립 선언 100주년, 1893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400주년에 이어 또다시 역사적 사건을 주최의 계기로 삼게 되었다. 신생국 미국이 세 차례 박람회 때마다 역사성을 내세웠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 100주년 말고는 딱히 역사를 내세운 경우가 없었다. 아무래도 역사가 일천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가 반영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박람회는 루이지애나 매입 서명일인 1803년 4월 30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에 맞춰 개막일을 잡았으나 외국의 참가 신청이 저조해 1년 연기되었다.

박람회장은 세인트루이스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교외의 포리스트 파크로 결정되었다. 시카고박람회장보다 2배가량 넓은 12.72제곱킬로미터의 울창한 숲 지대였다. 조직위원회는 이곳에 불을 지른 뒤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작업을 했다.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그루터기와 뿌리를 뽑고 언덕을 깎아내리고 자연호수를 묻어 작은 인공호수로 만들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대규모 자연파괴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하루 평균 1만 5000명의 인력이 박람회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박람회 조직위는 이곳에 문자 그대로 거대한 인공 도시를 만들었다. 구내 도로 길이만 120km에 달했다. 1576채의 건물은 대부분 목재 골조에 석고와 대마 섬유를 섞은 스태프(staff)라는 자재로 지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화이트 시티’가 아닌 ‘아이보리 시티(Ivory City)’라는 별명이 붙었다. 건물은 모두 박람회 이후에 철거할 임시 구조물로 지어졌고, 건축 양식은 프랑스의 화려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가 주류를 이뤘다. 박람회장이 워낙 방대했던 탓에 5개 구역으로 나뉘어 구내 철도와 고가 철도가 건설되었다. 단일 건물로서는 가장 커다란 규모였던 농업의 전당(Palace of Agriculture)은 바닥 면적이 32만 4000제곱미터였다. 박람회장이 어찌나 방대했던지 웬만큼 둘러봤다고 느끼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개요*

공식명칭: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Louisiana Purchase Exposition)
주제: 루이지애나 매입 1백주년 기념
장소: 세인트루이스 서부 포리스트 공원(Forest Park)
기간: 1904년 4월 30일~12월 1일
랜드마크: 루이지애나 기념비, 페스티벌 홀, 파이크 놀이공원
박람회장 주체: 루이지애나 구입 박람회 회사와 정부 조직위원회
박람회장 규모: 515헥타르(155만 7875평)
전시물 출품자: 미국인 1만 5009명, 외국인 60명
참가국: 60개국
관람객: 1969만 4855명
입장료: 어른 50센트, 어린이 25센트
심사위원회: 1048명
시상: 대상(837개), 금·은·동 메달 등 총 3만 9158개 상 시상
비용: 2500만~3150만 달러
수입: 260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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