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 EXPO] 에펠탑 주변 물들인 戰雲의 공포감

1937년 파리박람회

공식명칭: 현대생활 예술·기술 국제박람회
????????????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et Techniques dans la Vie Moderne)
주제: 현대 생활에 응용된 예술과 기술
장소: 샹드마르스, 센 강변 일대
기간: 1937년 5월25일 ~ 11월25일
랜드마크: 평화의 기둥, 샤요(Chaillot)궁
박람회장 규모: 105헥타르(31만7625평)
전시물 출품자: 1만 1000명
참가국: 46개국
관람객: 3104만 955명
입장료: 6프랑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이었던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여 빚어진 참상을 표현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뉴욕 현대미술관이 1981년 스페인에 반환했다.

왼쪽에 죽은 아이를 팔에 안은 어머니가 울고 있다. 그 모습을 황소가 큰 눈을 뜬 채 내려다본다. 중앙에는 부상의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말이 있고, 눈 모양의 등불이 마치 고문실의 전등처럼 말 머리를 비춘다. 그 아래로는 죽은 사람과 해골, 잘린 팔다리가 널려있다. 죽은 병사의 손바닥에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순교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엔 화염에 휩싸여 공포에 질린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스페인 내전의 참화를 형상화한 역작 ‘게르니카’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대표작 <게르니카(Guernica)>다.
가로 777센티미터 세로 349센티미터의 이 벽화는 1937년 파리 박람회장의 스페인관에 전시되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자 프랑코를 지지하던 독일군이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함으로써 빚어진 참상을 표현했다. 피카소가 스페인 정부로부터 전시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것은 박람회 개최 몇 년 전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벽화 제작을 미루다가 게르니카 피폭에서 영감을 얻어 한 달 반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전화에 휩싸인 조국의 모습을 그리되 사실적 묘사보다 입체파(cubism) 기법의 파괴적 구조와 검정색·흰색·회색의 비극적 색조를 사용했다. 그림은 투우(鬪牛)와 말 등의 상징성을 빌어 시공을 초월한 인도주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르니카>는 오늘날까지 국제박람회를 위해 요청 제작된 예술품 중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파리박람회 이후 유럽과 미국 각지를 옮겨 다니며 전시되다 1981년 다른 몇몇 피카소 작품과 함께 스페인으로 되돌아가 현재 마드리드 소피아여왕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파시즘 독재 세력인 프랑코와 치열한 내전을 벌이던 스페인 공화 정부는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해 파리 박람회장에 자체 전시관을 지어 호소력 높은 예술품을 전시했다. 피카소뿐 아니라 스페인 최고의 예술가들이 그 대의에 동참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 <사신(死神)>을 출품한 초현실주의 화가 미로(Joan Mir?)를 비롯하여 영화감독 루이스 브뉴엘(Luis Bunuel), 건축가 호세 루이스 세르트(Jose-Luis Sert), 라 카사(L. La Casa) 등이 그들이었다. 2층짜리 직사각형 건물인 스페인관은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건축물로 호평을 받았다.

에펠탑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본 소련과 독일의 전시관은 극단적 좌우이념이 대결하는 이미지로 세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왼쪽이 독일관, 오른쪽이 러시아관이다.

나치의 독수리, 소련의 낫과 망치와 맞서다

파리박람회에 드리운 전쟁의 그늘은 스페인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치 독일 전시관과 소련(USSR) 전시관은 에펠탑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선 위치에 서로 대결하듯 세워 졌다. 양국 전시관은 두 나라의 극단적 좌우 이념이 맞서는 이미지로 세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두 나라의 대결 구도는 평화와 진보의 이념 아래 세계 각국이 공존·협력한다는 국제박람회 취지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개최 일정이 계속 늦춰졌음에도 박람회 개막에 맞춰 완공된 참가국 전시관은 이들 두 건물뿐이었다.

두 전시관은 건축 콘셉트부터 평화 공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관 옥상에는 거대한 남녀 조각상이 세워졌다. 집단농장 콜호즈(kolkhoz) 노동자들을 형상화한 이 조각은 소련 공산 혁명의 상징인 망치와 낫을 든 손을 하늘 높이 쳐든 전투적인 모습이었다. 남녀 노동자상은 미학적 비율을 무시하고 건물 전체를 압도해 마치 건물이 조각상의 기단처럼 보일 정도였다.

1940년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장교들과 함께 에펠탑을 배경으로 걸어가고 있다.

독일관은 150미터 높이의 직사각형 탑 모양의 건물이었다. 그 위에 나치의 상징인 독수리가 만자 무늬(卍, swastika) 심벌을 발톱으로 움켜쥔 모습의 조각이 세워졌다. 독일관을 설계한 히틀러의 측근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는 전시관 설계 협의차 파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소련 전시관 설계 스케치를 보고는 그것이 독일 침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공산주의로부터 독일 민족을 방어한다는 방벽 개념에서 이 독수리 탑을 설계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독일관 내부의 모습.

독일관 내부에는 사원 건축과 요새 축성 등 게르만 민족의 시대별 문화와 기술이 주로 전시되었다. 소련관은 1917년 10월 혁명 20주년을 기념하여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념적 전시물이 주류를 이뤘다.

두 건물은 주제 전시관과 주요 참가국 전시관이 들어선 에펠탑 일대를 압도했다. 이번 박람회를 위해 새로 건축된 샤요궁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면 오른쪽의 소련관과 왼쪽의 독일관이 언제라도 맞붙을 기세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자아냈다. 샤요궁은 3년 뒤인 1940년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고 난 뒤 아돌프 히틀러가 파리를 굽어본 장소로 유명하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당시 히틀러의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았다.

결정론적 시각이지만 2차 대전의 전운은 파리에서 전조를 드러냈다. 1937년 파리박람회는 이처럼 모순과 비극을 배경으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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