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소설가 황순원’ 아들 시인 황동규의 ‘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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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창수 시인] 황동규는 소설가인 황순원의 아들로 ‘국민 연애시’라고 칭할만한 ‘즐거운 편지’를 추천받아 문예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현대인들이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전통 사회의 방식에 따라 죽음을 또 다른 삶으로 수용하는 종교적 방식, 두번째로는 죽음은 생명의 멸절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이해 방식이 있다.

과학이 神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죽음 이해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편안한 죽음 이해이며 자기 죽음도 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적 방식의 죽음 이해는 삶과 죽음을 적대적 관계로 보는 시각으로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몸을 자신으로 믿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죽음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는 죽음을 종교에 의지하여 他力 구원의 방식으로 이해하지도 않으면서도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로 바라보지도 않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이 자리’를 철저하고 충실하게 살아냄으로써 현생의 만족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미련을 해소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사후의 삶은 어차피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충실하게 살면 삶과 죽음을 모두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자연 순환적 죽음 이해다.

동물들도 자기 죽음을 느끼고 자기가 죽을 때를 안다. 연어는 강에서 부화하여 바다로 가서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러나 동물들은 죽음을 사유하지는 못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자기 죽음을 사유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죽음을 사유할 능력이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사유하며 살지는 않는다. 죽음을 사유하는 사람은,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로 살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의식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미래로 향할 때 그 끝에서 자기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 실존은 자지러지지만 결코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현존재로서, 세계 내적 존재로서 충실한 삶을 사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황동규는 ‘풍장’이라는 연작시 70편을 썼다. 풍장은 시체를 지상에 노출시켜 자연히 소멸시키는 장례법이다. 우리나라 풍장은 주로 해안가나 섬 지방에서 행해졌는데, 그것은 바다에 나간 아버지나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주검을 땅에 묻지 않고 초막에 두었던 데서 유래한듯하다.

시적 화자에게 풍장은 위의 세 번째 죽음 이해에 해당한 것 같다.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를 보면 그는 그 어떤 존재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이나 마음이 없는 것 같고 영원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려는 의도가 추호도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문명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되어 자연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가방도 옷도 구두도 양말도 벗기우고 시간을 떨어뜨리고”자 한다. 황동규의 죽음에 대한 치열한 사유가 현존재로서의 죽음 이해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풍장(風葬)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외할머니는 가장 편안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피부는 아직도 따뜻했다. 돌아가신 모습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생명으로 환하다는 것은 역설적이었다.산 사람들의 통곡이 도리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죽음은 멀고 무서운 게 아니었다.

장례의식이란 것도 산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절차였다.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복잡한 의식을 만들어낸 것 같다.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자신에게도 닥칠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복잡한 절차들을 고안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 두려우니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두려고 한다. 그러나 망자는 알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과연 무엇인지를, 그리고 죽음 역시 농담처럼 가볍고 사소한 것임을…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별의 서러움이야 어찌 없겠야마는 그래도 나는 담백하고 담담하게 이 세상을 뜨고 싶다. 의식이 명료한 가운데 웃으며 갈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또한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부탁하고 싶다. 내 죽거든 눈물을 흘리지 말 것, 나를 위한답시고근엄한 종교의식도 하지 말 것,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말 것, 조용히 화장해서 나무 아래 뿌리거나 아니면 흐르는 물에 띄워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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