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불편한 진실···나희덕 ‘못 위의 잠’

htm_2014092315139a010a011[아시아엔=김창수 시인, 한빛고교 교장 역임] 나희덕은 모성애에 기초하여 자연적 생명이 이지러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서정적인 시를 주로 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맞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는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살고 게으르면 못 산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생산 활동에 투여되는 노동이 상품화 되면서 세계는 베짱이가 개미를 지배하는 시대로 역전되었다. 노동과 자본에 교환이라는 마술이 개입되면서 개미가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개미는 빈곤해지고 베짱이는 배가 불룩해지게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개미는 가난도 문제이지만 언제든지 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희덕의 시에 나오는 아비 제비는 실업 상태에 있고 어미는 일용직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는 자신의 잘못으로 실업자가 된 것이 아님에도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과 밤늦게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로 남는다. ‘피곤에 지친 한 여자’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저 엄마이기에 좋아하는 아이들 앞에서 ‘못 하나, 그 위의 잠’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희덕의 시는 산업문명 시대의 민중들의 자화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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