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비키의 명상24시⑦] 소음 속 휴식하며 활력 찾기
지하철서 이어폰 대신 귀마개 끼고 내면의 소리를
[아시아엔=천비키 본명상 코치] 어느 날 필자가 일하는 ‘본명상’에서 명상을 시작한 분이 묻는다. “사범님, 본명상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아세요?”
무슨 소리였을까? 마음 속으로 나는 ‘침묵과 고요의 소리?’ 하고 반문하려는 차였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빵빵, 삐요삐요~ 경적소리와 앰블런스 소리예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대로변에 위치했기에 명상 때는 못 느끼지만, 명상 전후 소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그녀도 알아챈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예요. 뭔가에 몰입하거나 명상에 깊게 들어가면 이 공간처럼 고요하게 느껴지는 곳도 없어요. 좋은 맘 품고 명상하려는 에너지가 차있어선가 봐요.” “그렇겠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회원님의 마음 상태에 따라 소음이 작아지기도 하고, 더 커지지기도 하지 않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봄 혹독히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기 끝에 목소리가 쉬기 시작했다. 목청을 ‘음음~’ 하고 가다듬어 주면 목소리가 다시 살아나곤 했다. 그런 식으로 간신히 한달 정도 버텼는데, 나중엔 목을 쥐어잡고서야 겨우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고 급기야 말이 안나오는 상황까지 돼버렸다.
통증과 진땀이 기운을 고갈시켰다. 괴로운 것은 내 목소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 괴로운 건 내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없는 거였다. 힘들 때마다 습관처럼 큰 소리로 ‘천비키, 잘 할 수 있어. 힘내!’ ‘화이팅, 비키!’ 하며 스스로 격려해주길 좋아하던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전화통화는 물론, 직접 만나서도 힘겹게 속삭이거나 손짓, 눈짓으로 혹은 글자로 소통해야 했다. 내가 말하려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나에 대한 염려로, 나는 심한 목 통증으로 미간은 찌푸려지고 대화는 엉망이 됐다.
그럴 때마다 마음 안에선 전쟁이 일었다.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리들은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는 듯했다. 말을 못하게 되자 소리없는 아우성이 나의 내면에 갇혀 있는 게 하나씩 느껴졌다. 그렇다. 정작 나는 내 소리를 듣지 않았던 거다. 주변 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저 메시지를 전하려는 욕구에만 꽂혀 그들이 뭘 바라고 말 하려는지 생각도, 듣지도 않았던 거다.
한달 반쯤 지나 대학병원에 가서 음성치료를 시작하면서 모든 일정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늘 명상을 해왔건만 무슨 이유에서 온 걸까? 10여년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졌던 나를 기적같이 회생시켜준 명상에너지가 모두 소멸됐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컨디션이 조금만 나아지면 출장 가고, 강의에 나서며 내 맘만 다잡으면 약한 체력 정도는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더….’ 하면서 힘이 부치는지도 모른 채 일에 몰입했던 것이다.
그런 깨달음 뒤에 멈추어서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머릿 속 소음, 쉴 새 없이 지껄이는 마음 속 재잘거림을 애써 들어보았다. 어라? 단순한 잡음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몸의 소리가 아닌가!
“너무 아파요. 힘들어요. 비키님 제발 좀 쉬어요.” 내 속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나는 급기야 자신을 보호하려고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진작 멈추어서 몸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을. 내 안의 소리는 깡그리 무시하면서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막연히 변화되기를 바랬으니, 불타는 의욕과 철없는 욕망이 내 목을 괴롭힌 것이다.
그걸 느끼자 상대방 음성도 고요히 들려왔다. 내 안의 소리도 들렸다. “그건 아니야” “이건 그게 맞아” 하며 부정적이고 아는 척하는 소리, 내 잣대만 들이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걸 들을 때마다 호흡으로 흘려보내며 눈빛으로 반응했다. “내 입을 닫고 상대방에 귀기울이자”는 소리가 내 가슴 속으로 전해져 왔다. 상대방의 말 저 너머의 눈짓, 몸짓, 손짓…. 그 수많은 ‘짓’들도 보이고 숨은 소리들도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한테선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내면의 고요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때, 또 허공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소음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오케스트라의 향연’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천상의 소리가 따로 있으랴. 지난 봄, 목소리를 잃었던 경험이 무척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소리듣기 명상’은 소음 속에서 지칠 때 휴식하며 힘을 되찾는 방법이다. 또는 대화 중에 상대에 대한 판단으로 마음이 소란해질 때 머리를 맑게 하는 명상이기도 하다.
? 안정되고 편안한 명상자세를 취하기 위해 눈을 감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심호흡을 10번 한다.(<매거진 N> 6월호 참조)
?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겠다는 의도를 세운다.
? 이제 나의 주위력을 빼앗는 소리를 하나씩 들어본다. 크고 작은 소리, 가까운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말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듣는다. 중요한 것은 무슨 소리인지 구분하지 말고 소리를 소리 그 자체로 듣는다.
? 소리를 들으면서 잡념이 생기면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자각한다. 내 숨소리도 듣는다.
? 내면의 소리를 듣고 고요해졌다면 다시 외부의 소리 세계로 나아간다.
?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과 ?를 반복한다.
? 소리를 통해 외부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오가며 소음 한 가운데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깊은 고요가 있음을 인식해 본다.
? 내 안과 밖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살아있는 우주의 전체적인’ 울림으로 듣는다.
?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과 내면의 고요에 감사한다.
그날 소음의 신비를 말해준 회원과 나는 아예 본명상 출입문도, 대로변으로 난 창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 명상에 들어갔다. 명상이 살아 꿈틀거리며 오롯이 삶 그 자체가 되려면 소란하고 요란스런 갖가지 소리를 벗삼아 들으면서 중심을 잡는 것도 큰 수행이리라 여기면서.
엘리베이터의 ‘땡땡’, 버스의 ‘부릉부릉’, 에어컨의 ‘웅웅’ 소리, 사람들 발자국 소리들이 크게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활짝 열린 창처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창에 다다르면서 이 소음들은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진동일 뿐이다.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귀마개를 사용하며 내 숨소리와 몸의 소리를 듣는다. 어떤 때는 일부러 고요한 공간에 찾아들어가 허공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특히 장거리 출장 때는 귀마개를 하고 잠에 빠져든다. 절대 고요 속에 완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노자는 “침묵은 위대한 계시”라고 했다. 내면과 주변의 소리를 구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을 때, 고요와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는 어느 새 생동감으로 충만해진다.